• Bhang, Youngmoon

마음을 비워라 Empty Your Mind

"If nothing with you stays rigid, outward things will disclose themselves(자신을 경직되도록 하는 것이 없다면, 표출되어야 하는 것들이 스스로를 드러낼 것이다)" - Bruce Lee

아직 서울시민이었던 중학생 시절, 집에서 걸어서 30분이 조금 안되는 중계동에 공공 도서관이 하나 있었다. 거의 매일 도서관에 간다고 하니 부모님을 비롯해 모두가 좋아라 했겠지만, 실상은 자료실 앉아 어떻게 하면 급우들을 더 잘 괴롭힐 것인가를 연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당시 2권으로 확장되어 출간되었던 부르스 리 Bruce Lee 의 <절권도>였다. 누군가 죽여 패는데 엄청 도움이 될 듯 하여 꺼내 들었던 이 책이 이후 생각을 바꿔놓는다.


부르스 리는 워싱턴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그가 어떤 학생이었는지 일일이 알기는 어렵지만, 기본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논증할 수 있는 소양은 갖추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또한 그는 '엽문 葉問'에게 직접 무예를 배운 학생이었다. 견자단 주연의 영화에서는 매우 철없는 십대로 그려지는데, 엽문의 입장에서 부르스 리는 당연히 그런 모습이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부르스 리가 말썽을 부리고 逃美 생활을 시작한 것이 그의 인생의 큰 전환점이었다는 사실은 꽤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났고, 미국법에 따라 미국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무언가 이루어지려면 나의 의지적인 혹은 의지와는 상관없는 준비가 있어야 하는 모양이다.


당시 국내 편집본에는 '이소룡'으로 잘 알려진 이 인물에 대한 신화적 부풀리기, 소위 요즘 '유튜브 YouTube' 가면 볼 수 있는 '카더라~' 식의 콘텐츠가 엄청나게 더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눈에 들어왔던 것은 그가 왜 이런 것을 만들었고, 책으로 만들었는지에 관한 내용이었다. 본래 출간 내용에 가까운 영역본을 보면 헌정사, 추천사, 차례목록 이후 바로 'EMPTY YOUR MIND'라는 장이 나온다.


<Bruce Lee의 'TAO of JEET KUNE DO' - 이 책은 사실상 절권도를 가능하게 하는 생각과 기술적 사례에 관한 책이다>



마음을 비워라 #1


"If nothing with you stays rigid, outward things will disclose themselves." (자신을 경직되도록 하는 것이 없다면, 표출되어야 하는 것들이 스스로를 드러낼 것이다)

- Bruce Lee


'마음을 비운다'는 의미를 禪을 통해 이해한다는 것은 사실 매우 어렵다. 많은 경우 禪의 맥락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禪이란 '언어에 대한 부정의 전통'에서 비롯된 동아시아 불교에 기본을 둔다. 역사적으로도 초기 승단의 출가자 중심 불교가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중국으로 들어갔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한 무제(武帝 BC 141~BC 87 재위)는 장건이 헤매고 다녔던 길을 통해 무역로를 개척한다. 오늘날 실크로드로 알려진 경로가 여기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는데, 더 오래 전에는 흑해-카스피해 초원에서 발원한 '인도유럽어 Indo-European Language' 화자들의 일부가 이 경로를 통해 동아시아 쪽으로 들어 올 때 이 경로를 선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흔히 大乘으로 알고 있는 불교는 나가르주나(नागार्जुन, 龍樹)의 논리를 기본으로 한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나가르주나는 150년 경의 사람이다. 붓다 사후 거의 500년 정도 이후의 사람인 셈이다. 현실적으로 보았을 때, 불교는 갠지스 강을 중심으로 본래 '베다'의 세계 속 주류가 되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인도는 기본적으로 언어에 집중한 전통이나 나가르주나의 출생지로 여겨지는 인도 남부 지역이라는 곳은 오늘날 '텔루구어' 지역이다. 禪宗의 조사로 여겨지는 달마 대사의 경우 칸치푸람 출신으로 보고 있는데, 이 지역은 '타밀어'를 사용하고 있다. 텔루구어와 타밀어 모두 드라비다어족에 속한다.


벽암록(碧巖錄)의 제 1칙을 보자. 확연무성(廓然無聖)이라는 말과 '불식 不識'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는 이 내용은 禪의 사고방식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1. 텅 비어 있는데 무엇이 성스러울 것인가? - 廓然無聖

  2. 모르겠다- 不識


언어에 집중한 전통인 인도 사상의 문제를 발견하는 것은 산스크리트어를 사용하고 있는 브라흐만들 입장에서는 여러가지로 어려운 측면이 있다. 나가르주나의 유명한 '중론 中論'은 언어의 문제와 이를 통해 만들어지는 당대 개념화에 대해 아주 철저하게 파고 들어 문제들을 드러낸다. 달마(菩提達摩)가 선종의 조사로 언급되는 전승 또한 언어가 세상을 담는 적절한 그릇이 아니라는 사고방식에 근거한다고 보는 것은 여럽지 않다. 주부 술부의 분리가 명확한 인도유럽어 Indo-European language 전통에서 본다면 '우파니샤드'와 이후에 일어나는 수많은 '요가'적 관점에서 볼 수 있듯이 세부적인 개념화가 일어날 수 밖에 없다. 현상과 본질을 분리해서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드라비다어 지역에서는 이러한 접근을 달리해 볼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것인데, 그러다보니 나가르주나는 언어라는 그릇의 문제를 들춰냈고, 달마는 선종의 조사라는 전승이 되어 깨달음은 언어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측면이 강조되기 시작한다.


이렇게, 대승불교와 선종이 중국에서 자리를 잡아가는 것은 그러한 접근들이 동아시아인들의 사고방식과 너무나 잘 맞기 때문이었다. 위진시대(魏晋時代) 학문적 성취라 볼 수 있는 '노장 老莊'의 프레임으로 많은 것을 이해하는 관점에서 나온다. 이렇게 격의(格義)라는 연구방법에 의해 수용되는 불교는 老莊적 프레임에서 그것들을 바라보도록 만들었다. 소위 無 사상과 불교의 空의 대입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이 많은데 이는 실질적으로 붓다의 가르침에 가깝다고 보기가 어렵다. 오히려 붓다가 출가 후 고민하며 '부족한 것들'로 여겼던 가르침들로 劣化(Generation loss) 되는 위험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나 언뜻, 격의로 받아들인 불교와 이후 들어오는 대승불교, 달마의 전승 등은 이러한 프레임에 맞추기 쉬운 것들이 많았던 셈이다.


이러한 비언어적 전통이 禪의 이해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중국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에서는 전통적으로 추상관념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없다. 게다가 언어를 통한 접근의 한계성에 대한 현실적인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공자가 자신의 제자들에게 '맞춤형 답변'을 준 것 또한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현실적인 논의를 해야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주자학 전통의 경직성과 서양철학의 유입이 공자에 대한 불편함과 노자에 대한 재해석을 정당화했을 것이다. 오늘날 철학적으로 해석되는 '노장사상 老莊思想'은 마르크스주의적 역사관에서 보면 매우 근/현대적인 사고방식이 되는 것이다. 때문에 비언어적 전통의 禪을 언어적으로 이해하려는 움직임은 소위 말하는 '개항기' 이후의 이야기다.


이러한 비언어적 전통의 이해를 위해서는 소위 말하는 '징후적 독해'나 맥락적 이해, 배경사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필요하지만, 대부분은 돈오(頓悟)와 같은 생각에 빠져 일순간의 통찰을 전부처럼 느끼는 경향도 강하다. 그러니 '마음을 비우라 Empty Your Mind'라는 표현처럼 오랜 닦음(漸修)이 수반되어야 하는 경우를 외면하기 쉽다. 실상 이 두 가지는 상충한다기 보다 한몸과 같은 것이 아닌가?


깨달음으로 가기 위해 老莊적 프레임으로 불교의 가르침을 수용한다는 것은 결국 불교적 관점이 아니라 노장적 관점이 되는 셈이다. 사고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는 부분이나 관점을 좀 달리해서 보자면 결국 "마음을 비워라"고 말하는 사고의 뿌리가 되는 老莊의 틀이 비워지지 않는 무엇인가가 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자체를 그릇이라 해야할까?

이런 식이면 뭔가 시원치 않는 부분이 있는 셈이다.



마음을 비워라 #2


武人들의 설명은 매우 실질적이고 현실적이다.

'미야모토 무사시 官本武臧'의 이야기는 부르스 리의 이야기와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그는 때에 따라 어떻게 자세를 잡고, 대응할지 고민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마음의 상태가 바르다면 단련된 몸은 자연스럽게 움직인다는 것이다.


"Whatever guard position you assume,

do not think of taking a position,

instead think of being ready to strike."

- Miyamoto Musashi


미야모토 무사시의 <五輪書>는 그의 경험을 토대로 만든 '원칙론'의 집대성이라 볼 수 있다. 그러한 원리를 소위 '오륜'이라는 표현에 맞추어 적어가고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륜 輪'은 영어에서는 ring 으로 번역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노자가 전차의 바퀴를 이야기하고, 인도에서는 차크라 चक्र 전통이 있는 것처럼, 오히려 '바퀴 wheel'와 연관된 것이 그 뿌리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이 부분은 따로 고민해보아야 할 부분이지 싶다.


부르스 리의 <절권도>는 실상이 무술 즉, 싸우는 기술에 관한 책이 아니다. 내가 보기에는 절권도를 가능하게 만드는 발상에 관한 책이다. 절권도라는 것 자체가 기존의 것을 비우는 발상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지 어떠한 기술의 집대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안에는 복싱, 태권도, 사바트, 유도, 레슬링 등 다양한 鬪技들이 '언급될 뿐'이다. 그는 중국 전통 무술이 소위 말하는 '形'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유감 없이 표출한다. 소위 말하는 '초식 招式'에 관한 부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후대의 사람들은 '절권도'라는 분리된 기술체계를 수립하고 다시 부르스 리가 부정했던 길을 향해 가기 시작했다.

이미 그 이름만 취한 것인 경우가 많다.


사실 따지고 보면 招式이라는 것은 일종의 이미지 트레이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인데, 부르스 리의 지적은 초식의 단계에 맞추어 현실적인 무술실력이 나아지는 것으로 여기는 중국 내 '고인 물'들에 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수많은 분야들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과정을 이수하면 실질적인 능력과 관계 없이 어떠한 자격을 수여하고, 그것을 하나의 권력구조로 안정시켜 가는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招式은 그 원리를 이해하면 엄청나게 도움이 되는 것들이 많다. 그러나 태권도장의 품세가 승급, 승단을 위해 암기와 자세 위주로만 교육되는 것처럼 실질적으로 매우 쓸모가 없는 것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동작들을 만든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하고 실생활에 적용해 나가며 나의 것으로 體化하는 과정의 상실은 곧 형식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진다. 형식에 대한 집착은 곧 불필요한 '당위성'을 위해 불필요한 것들을 붙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체화를 통해 나의 일부가 되었을 때, 그리고 어떤 유파나 스타일에 맞추어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시기적절한 반응을 일으키게 되고, 그것이 곧 모든 상황에서 승리의 가능성을 볼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만큼 수많은 방법들이 존재한다.



마음을 비워라 #3


마음을 다스리는 가르침에서도 마찬가지다.

물처럼 흐른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것은 오랜 세월동안 가장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수로를 가장 적절한 힘으로 따를 때 가장 맑아진다. 이러한 냇가와 강줄기 같은 수로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것은 정신의 상태도 마찬가지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멸망은 당대에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일어난 일이다. 강의 유속 변화에 따른 퇴적층 구성 성분의 급변과 염류화와 같은 문제가 있으며, 과밀화로 인한 지역급성감염의 증대가 있다. 이중 상당 부분이 유프라테스, 티그리스 강의 流速과 관계가 있다.


예일대학의 제임스 스콧 James C. Scott 이 정리하고 있는 초기 국가의 환경 파괴들을 한 번 보자. 그는 초기 국가들이 자행한 자멸적 생태살해 ecocide 의 문제로 크게 두 가지를 제시한다.


하나는 숲의 파괴 deforestation 이고,

다른 하나는 염류화 salinization 이다.



숲의 파괴 deforestation


첫 번째는 벌목에서 비롯된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국가라고 해봐야 몇 만 명이 사는 곳에서 벌목이 큰 문제가 될까?

심각한 문제가 된다.

오히려 벌목과 강 지류의 관계를 잘 몰랐기 때문에 문제는 훨씬 김각했다.


초기 국가가 조금씩 발전하게 되면 성전건축이나 성벽건축을 위해서 목재가 대량으로 필요하게 되는 시점이 온다. 특별히 성전(É.GAL (𒂍𒃲,"palace", literally "big house")) 건축은 국가의 주신(major god)과 통치의 정당성이 곧 바로 연결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했을 것이다. 수메르 이후로 신의 계보들을 계속해서 이어 자신들의 국가 통치가 정당하다는 점을 주장하는데 활용했을 것은 뻔하다.


최근의 탐사기술을 통해 알게 된 사실 중 놀라운 것은 우르크 지역 등은 당시 해안도시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현재의 쿠웨이트, 이라크 지역은 페르시아만 조수에 의해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지역이였다. 이 지대는 현재보다 10m 이상 낮았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최근의 연구 결과다. 인류의 초기 정착지가 이곳에 형성된 이유는 바로 이러한 해안가를 통한 풍부한 해안 자원 - 오늘날의 아부다비 Abu Dhabi 같은 지역도 석유산업 이전에는 어업을 중심으로 하던 곳이었다 - 과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을 통해 오랜 세월 쌓인 영양가 높은 땅으로부터 다양한 식물을 얻었을 것이다. 말 그대로 에덴동산과 같은 지역이었던 셈이다.


초기 남부 메소포타미아 지역 사회가 이러한 강의 축복으로 시작되었다면,

문명의 규모가 커지고 국가가 형성되며 제국화와 성전과 성벽 건축에 몰입하자 상황은 바뀌었다.


우선 운송의 용이성과 노동력 절감을 위해서는 벌목을 할 때 강에서 가까운 지점을 중심으로 하게 된다. 그 옛날 레바논 향백나무를 어떻게 우루크까지 옮겼을까? 기원전 3천년 이후로 벌목으로 인해 유프라테스강 상류지역의 삼림이 파괴된다. 물류 편의를 위해서는 당연히 강 상류로 장비만 들고 이동해서 벌목을 하고 무거운 나무들을 대량으로 옮기는 것은 강을 통해 옮기는 것이 좋다. 따라서 벌목은 도시가 위치한 강 지역보다 훨씬 상류쪽에서 이루어질 수 밖에 없었다.


산림이 파괴되면 강의 유속에 변화가 생긴다.

침전물과 토사의 움직임에도 변화가 생긴다.

수 만 년에 걸쳐 일어나야 식물에 풍부한 영양을 줄 수 있는 토양이 만들어지는 과정인데,

급작스럽게 변하며 토양이 망가지는 현상이 일어난다.



염류화 salinization


이러한 문제와 더불어 농토를 위한 관개수로와 함께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염류화 문제이다. 현재도 페르시아만 인근 지역, 국가에서 생수를 구매해보면 물의 염도(salinity)를 중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우디아라바아의 가장 큰 프로젝트 중 하나는 '담수화' 사업 (turn salt water into fresh water)이다. 농산물을 위한 프로젝트다. 이 지역의 지하수는 염분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반복된 농업으로 땅의 양분이 줄어들고 염분이 포함된 물이 유입되면 거둘 수 있는 작물은 매우 한정적으로 변하며, 그 마저도 거둘 수 있는 양이 매우 줄어들게 된다. 로버트 아담스(Robert McCormick Adams)에 의하면 기원전 2,400년경 남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생태적 몰락 원인은 토양의 염분 때문이었다고 한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근본적인 원리에 헌신하고자 하는 것


나는 도를 닦는다는 사람들이나, 수행을 한다는 사람들이 결과적으로 '강의 유속을 바꾸는 행위'를 하는 것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기후의 변화나 자연의 파괴가 결국 '경관의 조성'이라는 총체적 문제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 '친환경 농업' 같은 語不成說을 내뱉도록 만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전통적 방식으로 벌목을 하는 것이 친환경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유파의 가르침, 스승과의 계보와 같은 것들을 생각하면서 어떻게 마음을 비운다고 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쌓아올린 것들이 생각에 방해가 되어도 자기부정에서 오는 허무감이 두려워 그것들을 철저히 버릴 생각을 못하는데 어떻게 마음을 비운다고 할 수 있을까? 가득찬 찻잔에 새로운 차를 부을 수 없다는 비유는 너무나 흔하게 알려져 있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은 정말 얼마 되지 않는다.


강의 수로란 인간의 생애와는 다른 매우 긴 시간 동안 천천히 조성된 것이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흐르면 그 물줄기가 자연스럽게 변한다. 거대한 순환구조에서 가장 기본적인 원리를 따라 조성되는 것이다. 인류 문명의 문제란 바로 이러한 것들을 인위적으로 조정했다는 점에서 시작된다.


전통적 방식이란 아무리 일러도 신석기 시대를 한참 지난 상태를 의미한다. 이미 셀 수 없이 많은 문명들이 환경을 파괴하고 자연적 원리를 벗어나 살았기에 멸망하고, 죽어갔던 시대의 이야기다. 오히려 그런 것들을 발견한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이 훨씬 건전한 것들이 많이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 '전통'과 자신의 배경 지식을 이루는 '뿌리'에 대한 집착 때문에

생각의 개정을 방해 받는다면 과연 마음을 비운 것이라 할 수 있을까?


마음을 비우고, 물처럼 흐른다는 것은 지금까지 내가 쌓은 것들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럴 때 上善若水 처럼, 정말 알아야 할 것과 가야 할 방향으로 갈 수 있다. 고정점이 없기 때문에 불안할 수 있지만 움직임에는 원리가 있음을 이해한다면 곧 자연스럽게 따를 수 있다.


어제까지의 생각이 부정되지 않는다면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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