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I sit quietly for a moment on a park bench or on a rock in the forest and start to pay attention to how I see, I been to realize that what is happening is that my vision shifts from point to point at an incredible speed. I focus my attention from object to object. In other words, I am 'looking around.' My mind is assembling a picture that I experience as a whole.
"내가 공원의 벤치나 숲속 바위 위에 앉아서 가만히 나의 바라봄의 순간에 집중해본다면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인식하게 되는데 그것은 내가 바라보는 시선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아주 빠르게 그 집중하는 것들을 옮겨간다는 것이다. 나는 대상에서 대상으로 주의를 집중한다. 말하자면 나는 '둘러보는 것'이다. 나의 마음은 하나의 그림으로 모아지는데, 그 그림은 내 이러한 경험의 총체이다."
<Teaching Photography: Notes Assembled>, EXERCISE #3: HOW TO LOOK
필립 퍼키스(Philip Perkis)
사진가 필립 퍼키스 Philip Perkis 의 작품집 <The Sadness of Men>은 서문부터 작품 전체를 너무나 좋아한다. 그는 우리가 일상 속에서 너무나 쉽게 접할 수 있는 그러한 상황들을 정말 사진가답게 바라보는 사람이 아닐까 한다. 그런 필립 퍼키스 답게 ‘바라보기’의 중요성을 그의 책 <사진강의 노트 Teaching Photography: Notes Assembled>에서도 자주 강조하고 있다. 책 안에는 구체적인 연습법도 소개되고 있다. 그는 사람의 눈과 카메라의 렌즈가 얼핏 유사한 측면이 있지만 결론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것임을 강조한다. 사진 또한 그렇다.
일전에 한 영상을 통해 중심와, 주변와 이런 이야기들을 꺼낸 적이 있다.
(동영상 링크 - [vLog] 경남 김해 출장 작업기 - '정치와 사진'에 관한 대화, https://youtu.be/cH0vNLe9MDY?t=234)
눈으로 보는 것과, 사진으로 나오는 결과물은 아주 많이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바라보기와 촬영하기는 병행이 되어 셀 수 없이 반복되어야 한다.
사람의 눈과 비교한다면, 카메라와 렌즈는 분명 부족한 측면들이 존재한다. 특히나 다이내믹 레인지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러한 ‘부족한 측면’들이 존재하기에 우리가 카메라를 컨트롤 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또한 오늘날 매우 빨라진 셔터 속도는 우리가 평소 경험하지 못하는 시각적 경험을 제공해준다. 또한 과거부터 가능했던 조리개를 잔뜩 조여 촬영한 사진 또한 그렇다. 혹자는 이것을 사진이 ‘시각적 무의식을 드러낸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연속적인 상을 보는 사람에게는 찰나의 순간에 의한 것이나 분단위 장시간노출이나 모두 생소한 시각 경험을 만든다. 카메라 셔터 속도에서 찰나의 순간에 가장 가까운 속도는 1/80초다. 찰나는 1/75초를 가리키는 말인데, 1초에도 75번씩 마음이 바뀐다고 해서 ‘오만가지 생각'이라는 말이 여기서 오는 말일 것이다.
1839년 1월 파리에서 있었던 한 모임에서 다게르(Darguerre)식 은판사진에 대한 보고서가 제출된다. 직접 은판 인화방식이었던 최초의 사진 작업들은 좌우가 뒤집히고 최소 10분, 대개는 30분 이상의 노출이 요구되었다. 1841년이 되어서야 피조(Fizeau)에 의해 노출시간을 제대로 단축시키는 성과를 얻는다. 그래도 2, 3분 정도는 걸리는 방식이다. 탈보트의 칼로타입 calotype 은 비슷한 시기에 8초 이내로 노출하는데 성공한다. 1851년이 되면 영국인 프레드릭 아처(Frederick Archer)에 의해 습판방식의 촬영으로 2초까지 노출 시간을 줄인다. 현재의 35mm 포맷 카메라들은 여건에 따라 1/8000초까지 가능하다(조리개 셔터가 아니라면).
180년의 기술적 성취로 1/8000초는 일상 속의 흔한 셔터속도이지만, 그 기술적 성취를 거스르기보다 다양한 표현방법을 얻고자 많은 사람들이 장시간 노출 작업에 열을 올린다. 이러한 사진의 결과물들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는 풍경들에 뭔가 심오하달까, 깊이있달까 하는 느낌들을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
사람이 생각하는 것도 비슷하다. 무언가 한곳을 오래 응시하며 생각에 잠기다보면 드물게 그 시간 가운데에서 자기자신을 마주할 수 있기도 하다. 자신만의 고유한 공간, 침묵의 시간이 거울처럼 나를 바라볼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물론 거기서 자신의 실존적 한계 상황을 망각하고 과몰입에 치중하면 자신의 정체성과 인식을 부정하는 부작용에 빠질 수도 있다.
왜 텍스트로 연습을 하는가?
사진은 결국 무엇을 사진 속에 담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와 그에 대한 답을 반복적으로 구하는 것이다. 연출촬영을 할 때에도, 밖을 걸어다니며 한 장 한 장 순간을 담아낼 때도 무엇을 어떻게 담을 것인가 하는 의문, 그에 대한 대답과 결정, 그리고 촬영이 끝난 뒤에 사진을 고르고, 다듬는 순간까지 수많은 선택들을 오고간다.
인간의 강점이란 언어를 통한 복잡하고, 추상적인 사고가 가능하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 이렇게 공간을 넘어 소통하고, 하늘을 날고, 달에 사람을 보낼 수 있는 힘의 원천이다. 언어를 통해 모든 것을 담아내기는 어렵다. 분명 인간의 언어에는 문제가 많이 있고, 자연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기보다는 전적으로 인간의 입장에서 보도록 강제하는 경향도 있다. 또한 우리가 모든 것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면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사진과 같은 별도의 시각예술의 필요성은 없을지도 모른다. 분명 우리는 언어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다.
그러나, 언어는 우리 사고의 가장 강력한 기반을 제공한다. 따라서 전부는 불가능하더라도 작품의 구상이나 과정의 일부를 언어로 또한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것은 분명 큰 도움이 되며, 그런 것들이 누적되어 이후에 매우 커다란 힘이 되어준다.
텍스트와 문화
문화를 누적된 정보로 이해한다면, 그 문화가 갖는 ‘누적성’을 가능토록 만들어주는 것은 언어임에는 틀림 없다. 집단 생활을 하는 모든 생물에게는 그 나름의 문화적 특성이 나타난다. 그러나 인간처럼 다양하고 복잡한 형태의 정보 누적을 보이는 생물체는 아직까지 지구상에 없을 것이다.
토마스 마르셀로는 그의 저서에서 인간의 생각이 발달해 온 단계를 크게 두 단계로 나누어 설명한다.
하나는 ‘공동 지향성 joint intentionality’이라는 것으로 관점과 (1) 상징에 의한 표상, (2) 사회적 재귀 추론, (3) 양자 간 자기관찰의 성격을 갖는 것이다. 집단의 규모가 더 커지면서는 문화를 중시하는 관점이 부각되는데, 집단생활이 거대한 협력활동이 되었으며 이것은 다른 집단과의 경쟁심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 앞서 언급한 ‘문화’를 만든 것이다. 관습, 규범, 제도로 정리되는 문화들은 일종의 집단의식 group-mindedness 을 형성한다. 이것을 토마스 마르셀로는 이것을 ‘집단 지향성’이라고 부르는데, 앞서 언급한 상징에 의한 표상, 사회적 재귀 추론, 양자 간 자기관찰에 새로운 단계들이 추가된다. 즉, (1) 상징과 재현에 의한 표상에서 관습과 객관의 의한 표상이 더해지고, (2) 재귀적 추론에서 더 나아가 성찰적, 논리적 추론으로 향해가며, (3) 양자 간 자기 관찰은 문화적 규범에 기반한 자기규제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소위 ‘자전적 기억 autobiographical memory’ 혹은 ‘일화기억 episodic memory’를 기반으로 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능력은 의미 기억 semantic memory 과 사건의 선체험 pre-experiencing an event 즉, 자전적 기억의 발달에 의해 과거와 미래를 다루는 능력이 강해진다는 것이다. 즉, 과거의 경험 그 기억을 통해 복잡한 미래 계획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E. Fuller Torrey)
나는 무엇인가를 ‘의식적’ 즉, 언어로 정리해 다루는 연습이 모든 분야에서 우리가 가진 능력을 발전시켜 준다고 믿는다. 따라서 사진의 이미지 트레이닝, 예술적 관찰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문장 즉, 언어로 정리하는 연습을 해보는 것이 매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이런 견해에 따른 것이 있다. 무엇인가 하면, 상상력에도 기반이 되는 기틀(frame)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떠한 상징 혹은 표현에 익숙한가에 따라 수용 가능 범위도 결정된다. 이를테면 우리가 고대 그리스의 신화에 익숙한 반면 다른 문화의 신화들이 매우 생소한 경우가 많다. 심지어는 우리 자신들의 문화적 뿌리가 되는 신화들의 이미지화를 진행해보면 사람들이 매우 생소하게 느낀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한 그리스/로마 신화들, 그레꼬-로만 문화의 배경에는 재미있는 특징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완전성을 추구하는 인간상이다. 그리스, 특히 유럽에서 형성된 신화 속에 깔려 있는 전반적인 특징 중 하나는 ‘인간형’ 캐릭터와 ‘비인간형’ 캐릭터의 이분법적 접근이 자주 등장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부족 사회가 커진 도시화를 이룬 문화권에서 상당히 많이 발견된다. 이를테면,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도시라 할 수 있는 수메르의 우르크 같은 경우에도 그들의 주신들은 ‘인간형 거인’으로 묘사된다. 그리스의 경우 이러한 경향이 심화된다. 인간의 의식이 점점 또렷해지면서 자연과 자신들을 분리하는 경향이 발생한 것이 아닐까? 성곽 속에서 자신들의 이득을 추구하는 유럽의 문화는 이런 식으로 심화되어, 인종적으로 유럽에 살고 있는 가장 흔한 인종들 즉 코카소이드 caucasoid 의 특징이 없는 다른 세계의 사람들을 괴물처럼 묘사하는 것은 흔하게 등장한다.
문자 기록은 단순한 상징들을 넘어선 조금 더 구체적인 정보들을 보존해주고, 그에 따라 집단의 기억, 집단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바탕이 되다. 이것은 개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정보의 교환 즉, 사회적 활동이 실질적으로 인간의 뇌와 그에 따른 지능을 발달시켰다는 것 그리고 인간의 고등한 지적능력은 뇌의 특정 부위보다는 부위간 발생하는 ‘네트워크’에 의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조금 더 최근의 연구결과다. 즉 높은 수준의 지적 활동의 핵심은 ‘네트워크’에 있는 것이다. ‘사회적 뇌 가설’은 현재 가장 널리 인용되는 이론이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호모에렉투스가 등장하고, 불을 다루기 시작하면서 사냥한 고기를 구워서 먹는 말하자면 외부에서 소화과정의 일부를 진행시켜 흡수를 촉진시키는 것도 하나의 요소이지만, 불 주변에 앉아 서로를 쳐다보던(이 시기 호미닌에게는 ‘바라보다’는 표현보다는 ‘쳐다보다’라는 표현이 더 맞지 않을까 싶다) 사회활동 또한 뇌 발달의 중요한 요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먹는다’라는 것에 미신적으로 집착하는 경향이 분명히 있다. 보면 볼수록 오늘의 인간을 만든 과거 오랜 기간의 ‘뇌 발달’이라는 과정은 복합적 상황을 통해 일어났다. 일정한 기능을 향해 전반적인 발전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이런 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뭘 먹어서’ 발전했다는 쪽으로 맹신하는 경향을 보인다. 오늘날 소위 건강상식이라 등장하는 ‘이거 먹으면’ 식의 포스트나 유튜브 영상을 보는 것처럼 말이다. 적절히 먹는 것, 적당히 먹는 것, 적절히 자는 것, 적당히 자는 것, 적절히 움직이는 것, 적당히 움직이는 것 이러한 것들의 ‘균형 balance’이 건강한 신체를 만든다. 무엇을 먹는 것은 많은 요인 중 하나일 뿐이다.
‘언어’의 사용은 이러한 사회 활동의 폭발적이라 할 만한 확장이다.
나는 여전히 언어가 인간에게 다루기 어려운 대상이라 생각한다. 여기까지 대략 A4용지 3장 분량의 글이 되지만 아마 꽤나 많은 사람들이 여기까지 읽기에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인간이 사용하는 소통에는 언어 외에도 여러가지가 있기에 언어만이 소통의 기반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지만, 반대로 여전히 인간이 다루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는 언어에 집중하는 것을 통해 더 나은 능력을 획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선택과 표현에 집중한 언어를 마주하다
문학 속 언어는 어떠한 주제와 소재를 선택해 잘 다듬은 표현을 통해 구체화된다. 이러한 과정은 사진과 매우 비슷하다. 사진 이론을 공부하신 분들이라면 익히 알고 있겠지만, 사진의 특징 중에는 사실 회화 즉, 그림보다는 언어와 비슷한 측면이 부각되는 것들도 있다. 특히 나는 본질적, 기능적으로 사진이 가지고 있는 ‘언어적 특징’에 끌린다. 그리고 거기에 집중한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크다.
이미지 트레이닝
많은 말들을 적어두었지만, 짧은 글로 요점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선택과 표현에 집중한 언어를 통해
사진적 상상력과 그 기반이 되는
시각적 관찰력을 키운다
여러가지 이유로, 우리가 가진 모든 능력의 발전이란 소위 말하는 trial & error 의 종합이다. 상상하고 - 계획하고 - 시도하고 - 평가하고 - 반성하고 - 다시 상상하고 - 다시 계획하고의 일종의 무한루프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 회전이 반복되고 반복될 때마다 조금씩 커져간다. 회전하는 가스 덩어리가 충분한 질량이 되면 돌덩이가 되고, 행성이 되고, 더 커지면 항성이 되고 극단적으로 질량이 거대해지만 블랙홀과 같은 천체가 되는 것처럼, 모든 것이 회전과 반복을 통해 ‘만들어진다’. 이것이 우주의 원리라면 우리의 능력도 큰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문장으로 된 장면을 보자
하인은 허리춤의 칼이 칼집에서 빠져나오지 않게 신경을 쓰면서 집신발을 그 사다리 제일 아랫단에 걸쳤다. 나생문 누각으로 가는 폭넓은 사다리 중간에 한 남자가 고양이처럼 몸을 웅크린채 숨을 죽이고 윗쪽 상황을 엿보고 있었다. 누각 위에서 비치는 불빛이 어렴풋이 그 남자의 오른뺨을 적시고 있다. 짧은 수염 속에 빨갛게 고름이 찬 종기가 난 뺨이다.
羅生門(나생문, らしょうもん)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 龍之介 - 소설가, 도쿄도 주오구 이리후네, 1892~1927)
일본의 문화는 즉물적 경향을 보일 때가 많다. 많은 신들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힌두교와 유사하기도 하지만, 인도의 힌두교는 개념과 현상의 추상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반면, 일본의 수많은 신들은 구체적인 생활과 관계가 깊다. "일본인들은 모든 것을 구체적 물건이나 실천적 행동을 통해서 파악한다. 그래서 원리 자체의 탐구를 회피한다. 이런 것은 원시사회의 특징이다”(이토 아비토(伊藤亜人)).
이러한 경향을 다른 세부 묘사가 등장하는 러시아 소설 <죄와 벌>과 비교해보면 재미있는 점이 발견된다. 도스토옙스키의 세부 묘사 또한 매우 시각적이고 구체적이지만, 그러한 묘사들이 자주 어떤 ‘추측’ 혹은 ‘추상적 개념’으로 도약한다. 물론 문학은 대개 묘사된 것들이 상징으로, 그리고 그와 연결되는 다양한 사건들을 의미로 연결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빈도와 경향에서 차이가 보인다는 것이다.
일전에 이런 이야기를 들은 것이 기억난다. 러시아 소설의 경향 중 하나가 세부 묘사가 많다는 점을 꼽을 수 있고 그것은 대륙이라는 생활환경, 장거리 여행이라는 어떤 상황 등이 이런 러시아 문학의 경향하고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데이비드 W. 앤서니(David W. Anthony, 인도-유러피안 역사, 언어학자, 미국) 같은 고고학자들의 책을 읽어보면 카스피해 북쪽 그러니까 지금의 러시아 지역이 인도-유럽조어(Proto Indo-European Language)가 발생한 지역으로 본다. 이러한 가설은 처음 마리아 김부타스(Marija Gimbutas, 고고학자, 리투아니아 1921년~1994년)에 의해 구체적으로 제시되었다. 이 사람들이 유목민들이었고 여러 곳으로 퍼져 나가서 지금의 서유럽, 남쪽으로는 이란과 인도까지 들어간다. 많은 지역을 옮겨갈 수 있는 특징은 단순히 이들이 인류 역사상 최초로 말을 길들이는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때문만은 아니다. 소통이 기술을 발전시키고, 기술은 소통을 심화할 수 있다. 따라서 언어적 묘사와 기술 또한 이들의 매우 큰 특징이었다고 여겨진다.
그 기나긴 여정과 독창적 문화를 보여준 북인도 정착자들이 만든 ‘베다 (Vedas, वेद)’와 같은 경전을 생각해보자. 브라흐미 문자 즉, 이들이 문자기록이 가능해 진 것은 기원전 800년 경이지만, 베다는 기원전 1,500년 경에 이미 완성 상태에 있었다. 그것은 구전 전승을 통해 가능했던 것으로, 동일한 인도-유럽조어에서 발달한 이들의 문화가 얼마나 언어에 집중한 문화였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우랄 산맥에서부터 다뉴브(도나우) 강변까지 뻗어가는 광활한 초원지대에서 생활하던 이들의 경향은 무의식 속에 남아 있었던 것일까? 러시아 문학 속에 종종 등장하는 세부적이고, 시시콜콜할 정도의 묘사들은 가끔 그러한 배경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든다.
그 관리는 그들에 대해 오만한 경멸의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이미 오십 고개를 넘은 중키의, 몸집이 단단한 사내였다. 반백이 다 된 머리는 제법 많이 벗어져 있었고, 오랫동안의 술로 말미암아 푸석푸석해지고 누렇다 못해 푸르스름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게 조그만 붉은 눈이 반들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어딘가 기묘한 점이 있었다. 그 눈동자에는 일종의 자랑스러움이 빛나고 있었다. 일찌기 그 눈동자에는 사려와 분멸 같은 것도 서려 있었다. 그는 낡아빠지고 단추도 떨어져 나간 검은 프록코트를 입고 있었다. 간신히 달려 있는 남은 한 개의 단추나마 예의에 어긋나지 않으려는 듯이 꼭 채우고 있었다.
<죄와 벌>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Фёдор Миха́йлович Достое́вски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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