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hang, Youngmoon

애플의 자체 CPU, 사진과 동영상의 시대 그리고 유튜브 - 우리는 무엇을 준비하고, 생각해야 할까?

#camera #pen #innovation


헝가리 태생의 멀티미디어 아티스트인 라슬로 모호이너지는 “(1930년대) 모든 교육체계는 경제구조의 산물이다(All educational systems are the results of economic structure)”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앞으로 다가올 세상에서의 문맹이란 지금까지 펜이 그러했듯이 카메라를 다룰 줄 모르는 사람들이 될 것(The illiterate of the future will be the person ignorant of the use of the camera as well as the pen)"이라고 주장했다. 앞으로는 문자만큼이나 이미지의 이해가 중요하다는 것이며, 워드나 스프레드시트를 다루는 능력 만큼이나 사진, 동영상을 다루는 기술이 일반화 되기도 할 것이다.


이렇듯, 각 매체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이 매우 중요한 것이라면 우리가 고민해보아야 할 것은 단순히 어떻게 할 것인가를 넘어서서 대체 이것들은 무엇인가를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문자의 역사적 배경이나 그림과의 관계 등을 천천히 고민해보면, 동영상이 이토록 일반화되는 시대를 맞이하여 우리가 고민할 것들이 무엇인지 보일 가능성이 더 높아지지 않을까?


고부스탄 암각화 © 방영문, 2017

문자는 태생적으로 통제의 수단이었다


기원전 3300년에서 기원전 3100년경 사이에 우루크에서 만들어진 가장 이른 시기의 행정용 점토판들은 대체로 곡물과 인력과 세금 내역을 적은 목록들이다(James C. Scott). 문자는 처음 서사나 언어를 기록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라기 보다는 세금을 징수하고, 물자와 인력을 관리하기 위한 기록 목적이 강했다. 인류의 초기 문자들이 음성 언어를 옮기기 적합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인간이 사회의 규모를 키워 국가와 법률 아래에서 살아가게 된다는 도식은 고대 로마인들의 사고방식이었다. 이러한 생각이 전통처럼 이어지며 유럽의 사상가들을 통해 확립되었다. 오늘날 거의 모든 근현대 국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입된 생각이기도 하다.


초기 문자들이 인간의 음성언어와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의아하게 느낀 적이 없다면, 단순히 발전사관적 사고방식에 젖어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역사적 지식을 갖추고 있다면 오늘날 필요한 행정 개념과 직업들의 대부분이 이미 고대 수메르나 이집트 사회에서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발전의 정도에서 비롯된 문제가 아니라 처음 개발할 당시 목적에서 비롯된 문제라는 점이다.


국가는 성립부터가 다양성과는 결별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극히 일부의 사례를 제외하고는 정착사회와 고정된 토지 없이 국가가 성립하기는 어렵다. 그리스나 로마, 페르시아 같은 '비교적 최근의 일들'을 오래된 사고방식으로 본다면 '국가의 통치와 정복'이라는 사고방식이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변화의 추이에 편승하지 못했던 고문명 사회가 있다면 아마도 이집트가 아닐까 한다. 이집트는 비교적 최근의 국가들보다는 조금 더 오래된 국가의 방식에 따라 인근을 떠도는 사람들을 끌어다가 인력을 충원했다. 구약성서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죄다 끌어가는 상황이 묘사된 것을 근현대 유럽의 학자들은 이해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이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기본적인 발상이었다. 그렇게 국가의 수도를 중심으로 인력을 두고 영토의 확장을 하는 것이다.


영토의 범위가 넓은 아케메네스 제국의 특징은 다민족 국가였다. 영토의 확장과 더불어 인력의 확충을 급속도로 이룬 것이다. 그러나 크세르크세스 1세 이후에는 파벌이 형성되고 갈라진다. 훗날 마케도니아의 젊은 왕 알렉산드로스는 이런 문제를 고민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때문에 그는 아케메네스 제국이 성취한 범위를 거의 그대로 정복하면서 헬레니즘이라는 강력한 문물을 함께 전파했다.

'정복', '지배', 그리고 '통치'를 위해서는 문화적 통일이 중요하다는 점을 생각한 것이 아닐까?


나는 평소 그가 인도 아대륙 남부까지 모두 정복해 헬레니즘을 심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요가나 명상 문화는

지구상에 등장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한다.

그랬다면 비틀즈 The Beatles 의 후기 업적과 히피 문화는 물론

스티브 잡스 Steve Jobs 도 등장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국가는 성립부터가 다양성과의 결별이라는 점은 토지의 관리나 운영 방침 등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논과 밭을 개간하고 단일 작물을 심어 강력하게 통제하는 방식은 효율보다는 실상 징세의 목적이 강했다. 국가의 영토 안에서 기근으로 굶어죽는 상황은 허다했다. 이것은 오히려 소위 '선사시대'라 불리우는 시기보다 영양결핍을 겪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착을 통해 인구를 늘리고, 사망률보다 높은 출산율의 유지를 통해 인구 감소를 막아도, 밀집된 사회에서 발생하는 각종 감염과 전염병으로 나라 하나가 멸망하는 것은 흔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측면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20세기 중반, 즉 전후 사회의 안정이 오기 시작하고 각종 의학 기술의 발달로 잠시 인류가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듯한 착시가 일어나고 있을 때, 수메르나 이집트의 고문명 사회를 UFO, 외계인과 연관짓고 싶은 생각이 강해졌던 이유 중 하나로 고대 왕국의 갑작스러운 왕조 교체나 국가의 멸망을 설명할 방법을 잊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어진다.


흔히 문자의 발명을 통해 역사적 사실들이 기록되고, 그러한 과정 즉, 문자의 사용이라는 전환적 사건을 통해 선사와 역사를 구분하고 싶어지지만 이것은 흔하디 흔한 단순화의 유혹에 불과하다. 문자는 무엇보다도 강력한 통제 수단이었다. 저비용 고효율의 통제 수단이었다. 더욱 적절한 이분법적 구분이 있다면 역사와 선사가 아니라 자유통제라는 구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단순히 도시국가의 통치와 지배 이념과 연결될 뿐만 아니라 문자의 개발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사고방식에 대한 통제라는 목적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벽 허물기: 경계 넘나들기


성벽과 해자 citadel 의 목적은 외부로부터 오는 적의 침입을 막는다는 목적도 있었지만, 동시에 내부로부터 사람들이 나가는 것을 통제하는 목적도 함께 있었다. 이후에 이것이 더욱 강력해지며, 특히 유럽의 성 castle 은 중세시대의 요새화한 건축물로 왕족이나 귀족에 의해 또는 군사적 목적으로(a type of fortified structure built during the Middle Ages predominantly by the nobility or royalty and by military orders) 만들어진 건축물이다. 우리의 경우도 그러하고, 중앙에 위치한 궁궐에서 도시 외곽 성벽까지 거리가 있는 경우도 있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벽'과 거대한 '문'은 핵심적으로 '인구의 이동'을 막는 것이며 이것은 양방향 모두에 해당하는 말이었다. 즉, 도시 인구의 이동을 통제하고 외부의 적을 막는 두 가지 목적이 함께 있는 것이다. 물론 성안 사람들에게 평소 “너희를 가두었다”고 말했을리 없다. 시대가 지나며 지배자들은 자신들이 그들을 지키는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었을지도 모른다.


초기 국가로 갈수록 성 밖에는 통제받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현대의 <반지의 제왕 The Lord of the rings>은 물론, 고대 그리스의 수많은 신화 속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미지의 세계인 성 밖에는 '야만족'들이나 알 수 없는 이들이 살고 있는 위험한 땅으로 묘사되는 사례는 적지 않다. 특별히 그리스나 로마인들은 헬라어나 라틴어 즉 자신들의 언어를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을 노예로 잡았다. 이들 노예들 중 대부분은 도시 밖, 국가의 외곽에 위치한 채석장 등에서 '소모되었다.' 시민들의 생활 장소인 도심에서는 특히 남성 노예들을 볼 기회가 적었다.


자신들과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을 야만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그리스/로마 신화 속에 아주 잘 드러난다. 미노타우루스, 메두사 등 인간과 짐승이 결합한 생명체들에 대한 경계심은 아마도 말이 통하지 않는 존재와 공존하는 방식에 대한 그들의 사고방식 또한 깊이 반영된 것인지도 모른다. 동아시아의 신화 속 반인반수 생명체들이 단순한 괴물로 묘사되지 않고 때로는 친근하게 때로는 신성하게 여겨졌던 반면에 그리스/로마 신화 속 반인반수는 대개가 괴물로 등장한다.


인도유럽어 Indo-European language 화자들의 조상이 유목민이었다는 학설은 매우 유력하다. 이들이야말로 정말 넓은 지역을 떠돌았던 사람들이다. 카스피해, 흑해 북부 초원에서 서유럽은 물론, 중앙아시아, 동아시아, 인도 아대륙까지 퍼져나갔다. 이들의 이동경로 중 일부는 훗날 실크로드로 재발견된다. 다양한 위도에서 수 천 년을 생활하다보니 이제는 유전형질이 같은, 실질적으로 같은 인종 간에도 경계하고 차별하고 있는 웃지못할 상황이 되어버리기도 했다.


강력한 문명에 도달하여 전세계와 특히 서양 문명에 확실한 특징을 부여한 그리스/로마 문명의 이러한 폐쇄적 특징은 초기 국가가 도달할 수 있었던 정점은 아니었을까? 경계를 긋고, 통제를 가하며, 이상적인 인간상과 삶과 세계를 그려봤지만 결국에는 변화라는 흐름 속에서 사라져 갈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고대 그토록 강력한 문명을 만들어 낸 것은 독자적 성장이 아니라

다양한 수용과 영향의 역사가 그 뿌리가 된다는 사실을 찾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는 점이다.



경계를 넘어온 문명의 영향들


기원전 3천년 경에는이미 크레타 섬을 중심으로 미노스 문명 Minoan civilization 이 헬레니즘의 기반으로 시작되고 있었는데, 섬을 통해 이러한 문명이 생성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의아할 수 있지만, 문명사적으로 주요한 고문명의 위치나 인도유럽어 화자들의 동선을 고려한다면 그리 신기할 상황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로마 신들 가운데에는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전해진 것으로 보이는 이름들이나 이야기들도 자주 보인다. 태음력과 주 7일 시스템 또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이미 자리를 잡은 시스템이었다. 7이라는 숫자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완전수로 자리를 잡았다. 7일의 각 요일에는 도시의 주신 Major God 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관례였으며 아마도 정치적으로 쇠퇴하는 도시들은 여기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러한 전통이 그리스/로마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주 7일 시스템으로 정착된 것으로 본다. 주 7일 시스템이 유럽에서 훗날 완전히 자리하게 된 까닭은 아무래도 창세기의 영향이 크지 않았나 싶다. 7일 시스템과 그레고리력 안에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로마의 주신 전통이 남아있다. 7일 시스템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문화에서 구약성서로, 요일의 이름들은 로마의 문화가 유지된 것이다. 7일 시스템을 수용한 창세기는 메소포타미아 도시국가 주신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유대인들에 의한 기록이었다. 창세기에서 사라진 신들의 이름은 로마신들의 이름으로 채워졌다.


경관 조성, 눈에 보이는 작물, 인구 이동 통제가 초기 국가의 기본적인 생성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신석기 시대 범람원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풍요로운 자연 작물들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을 선을 긋고 통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관개수로를 만들고, 벌목을 하는 과정에서 수 만 년 동안 천천히 만들어진 천혜의 메소포타미아 남부 습지는 모두 망가졌다. 국가가 설치면 망가진다는 것은 그 태생에서부터 확실히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그러한 지배논리와 통치체제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인류에게 유용한 다양한 지식과 정보, 실질적은 기술들은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들을 통해 발전했다. 측량기술이었던 수학은 이집트에서 그리스로 전해지며 오늘날의 고등수학을 탄생시켰고, 거의 모든 첨단 학문의 기본이 된다. 헬레니즘을 통해 중동으로 전해진 고등수학은 이슬람 학자들을 통해 더욱 고도화 되었고, 이것은 다시 르네상스 유럽에서 수용되어 레오나르도 다빈치 Leonardo da Vinci 와 같은 역사적 인물의 업적에 영향을 끼쳤다.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문자들은 페니키아 알파벳의 탄생을 촉진했고, 전세계 수많은 문자들의 탄생의 기본이 된다.


경계를 그어 생산을 통제하는 시스템보다

경계를 넘나들며 다양한 소스 source 들을 채집하는 시스템의 출력이

월등하다는 것은 다양한 분야에서 그 증거가 나타난다.



채집과 오리지널리티: 경계를 넘은 문화가 탁월하다


이주와 채집이라는 행위는 초기 국가의 정착과 농경보다 훨씬 생산력이 좋았다. 또한 주목해 보아야 하는 것은 질병과 영아 사망률에서도 더 나았다는 점이다. 인구가 충분히 늘어나고 농지, 목축지의 통제만으로 국가의 재정관리가 가능해지기 전까지 많은 사람들이 국가의 경계 밖에서 살아왔다는 것은 이제는 상식이 되어가고 있다.


이를테면, 채집이란 일종의 오픈소스 시스템인 셈이다. 제작은 자연이 했다. 초창기 문명이란 성벽을 쌓고, 글자를 적은 문명이 아니라 철을 따라 자신들이 있어야 할 곳을 찾는 것이 아니었을까? 수렵과 채집 생활도 자연을 기반으로 하는 충분히 훌륭한 계획 경제 시스템이었고, 이것은 농경에 비해 자연을 훨씬 덜 훼손하는 행동이었다.


경계지워진 공간과 통제는 초기 국가들이 선택했던 방법으로 보인다.

쉽게 말하면 잉여의 사유화가 시작된 것이다. 거대한 조직과 그것을 정당화 하는 과정이 국가 성립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왕권이 필요했고, 그것을 정당화 할 신화들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조상과 자신의 관계를 통해 토지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논리가 등장했을 것이다. 조상들 가운데 탁월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을 기렸으며, 세대가 지나며 이들은 신격화 된다.


수메르, 아카드의 신화 속 아눈나키들의 이야기나 길가메시의 키가 4미터나 되는 까닭은 그들이 외계에서 왔기 때문이 아니라 지배권의 정당화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 강했을 것이라는 점에 집중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길가메시의 이름 또한 어원적으로 '조상은 위대하다'라는 의미라는 해석도 있다.



길가메시 이야기


<길가메시> 속에서 등장하는 길가메시는 전형적인 성곽 안쪽의 사람이다. 인간인 아버지와 신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길가메시는 화려한 외모와 강력한 육체를 지닌 인물로 당시 인류 최고의 교육을 받은 인물이었다. 그의 친구로 그려지는 '엔키두'의 경우 숲속에서 짐승들과 함께 사는 존재다. 경계 밖에 살고 있는 존재에게는 '인성이 부재하다'라는 사고방식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성전의 창녀와 관계를 하고 나서야 엔키두는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얻는다. 여기서 짚어보고 싶은 것은 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굉장히 재미있는 몇 가지에 대해서 우리는 쉽게 넘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우선은 엔키두가 숲속에서 짐승들과 생활을 한다는 점인데 이 이야기의 시발점이 되는 메소포타미아 남부 어디에 그런 배경이 될 지역이 있는지 의문이 들지 않는가? 이러한 이야기들은 '당시의'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의 환경 등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러한 배경사들은 그냥 잘 모르고 넘어갈 일들이다.


어찌되었던 길가메시는 경계를 넘어 엔키두와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는 것이다. 비록 처음에는 도시가 파괴될 정도로 격렬한 싸움을 벌이지만 결국 서로 입을 맞추고 친구가 된다.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현시점에서의 현실 인식도 잘못된다. 애초에 충적토 습지였던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사막화를 가속한 것은 수메르와 같은 국가화가 이루어지면서다. 집단의 규모가 커지고, 지배 이데올로기가 등장하고 강화되면서 건축과 농경지 개발이 늘어났고, 이것들은 두 가지 심각한 환경문제를 일으켰다. 하나는 숲의 파괴 deforestation 이고, 다른 하나는 토양 등의 염류화 salinization 였다:

https://www.bhangyoungmoon.com/post/국가와-친환경-공존이-가능-생각들일까


길가메시의 기나긴 여행들은 엔키두와의 만남 이후에 이루어진다. 성 안의 사람과 성 밖의 사람의 교류라는 것이다. 거대한 숲속에 살고 있는 훔바바와 같은 괴물을 함께 물리치고, 신들의 요구를 당당히 거절하더니, 엔키두가 신들의 저주로 죽자 길가메시는 죽음에 관해 고민하며 대홍수의 생존자 우트나피쉬팀을 찾아 떠난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찔림'이라는 영생의 깨달음을 교훈으로 그러나 그것을 결국에는 다시 잃는 것으로 끝이난다.


당대 인류 최고의 문명이었던 우루크 안에는 왜 깨달음이 없었을까?



불교


불교는 인도아리안 문화 속에서 생겨난 마가다어 화자의 문제 의식이었으며, 이러한 문제 의식은 팔리어로 구전되다가, 마우리아 제국의 지배 논리가 되면서 산스크리트어로 기록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기록물들이 전해지고, 중국어로 번역된다. 이러한 중국어 번역물들이 한반도와 일본 열도까지 전해진다.


'아수라'라는 말을 인도이란어 쪽에서는 '아후라'로 발음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인도이란어 쪽에서 '신더'를 발음한 것이 오늘날 '힌두'의 어원이라고 보고 있다. 조로아스터교와 '불의 제식'(아그니 호트라)을 공유하면서도 그 주신에 대해서는 극히 적대적인 반응을 드러낸 것이 베다 Veda 였던 셈이다. 그렇게 인도로 넘어간 인도아리안들의 서사 속에는 '데바'들이 싸워 '아수라'를 물리쳤다는 이야기가 남아있다. 그리고 이 '아수라'라는 표현은 일본에 가면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존재의 신화적 기술을 위해 남용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경계를 넘어가는 과정에서 각기 새로운 이야기들 즉, 콘텐츠 contents 를 만들어 낸 셈이다. 우리가 특정한 가치평가에 의존하다면 이것은 변질이며, 모욕이다. 고대의 신화적 가치관 즉, 신화가 지배논리로 작용했던 시대로 간다면 이것은 전쟁감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일부 극단주의자들이나 근본주의자들을 제외한다면 아무도 이것을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강력한 플랫폼(불교)을 힘입어, 다양한 콘텐츠(각종 신화, 용어의 변경, 불상의 개발 등)들이 전해졌다. '불전설화 佛典說話'라는 용어가 있을 정도로 불교를 통해 동아시아에 전해진 이야기는 너무나 많이 존재한다. 특별히 유목민들과 인도유럽어 화자들에게 있어서 언어는 매우 신성한 것이었으며, 암송과 구전전승이 넘쳐난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오늘날 다양한 문화들의 원형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반도의 불상


문화유산이라는 것은 국가의 경계를 넘나드는 과정에서 위대해졌다. 한반도의 불상을 보자. 인도 내륙에서 불상이 만들어졌다는 주장도 존재하지만 사실 큰 힘을 얻지는 못한다. 불상은 오늘날의 파키스탄 지역, 잘 알려진 간다라 지방에서 본격적으로 만들어졌다고 보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당시 간다라는 마케도니아 총독이 다스리던 지역이다. 문화적으로는 그리스 문화가 들어온 셈이다. 불교의 전파와 민간의 신앙심 고취 같은 수많은 생각들이 만나서 삼국시대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불교문화와 예술품들을 만들어 낸다.


한반도의 불교미술이란 카스피해 - 흑해 초원에서 시작된 유라시아 스텝의 문화에서 시작해, 그들의 언어가 일군 헬레니즘, 인도아리안의 문화들 그리고 동아시아 문화의 교류에서 맺혀진 결정체이다. 이처럼 장구하고 거대한 흐름 속에서 이뤄진 위대한 인류의 작업을 한반도 삼국이라는 좁은 세계 속에 가두고 싶어하는 것을 보면 민족과 국가주의의 옹졸함에 새삼 웃음이 나온다.


이처럼 위대한 문화들은 경계를 넘어가며 그 벽을 허물며 일어난 것들이다.




동영상의 시대: 문자를 넘어서

- 기록의 새로운 사고방식


"인간은 문자 발명과 더불어 세계로부터 또 한 단계 소외되었다. 텍스트는 이제 세계 자체를 의미하지 않고, 세계를 찢어 놓은 그림을 의미한다. 텍스트를 해독한다는 것은 결국 텍스트에 의해서 의미된 그림을 발견하는 것이 된다. 텍스트의 의도는 그림을 설명하는 것, 즉 개념의 이미지인 표상을 파악 가능토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텍스트는 그림의 메타코드로 간주된다.


Thus with the invention of writing, human beings took one step further back from the world. Texts do not signify the world; they signify the images they tear up. Hence, to decode texts means to discover the images signified by them. The intention of texts is to explain images, while that of concepts is to make ideas comprehensible. In this way, texts are metacode of images."


Vilém Flusser


문자 또한 그 개념적 의미를 빼버리면 단순한 그림이다. 문자 이전의 그림이 그러했다. 그러나 반대로 동영상의 시대가 되면 그림에 대한 이해도 달리할 필요가 있게 된다. 처음의 그림은 명확한 개념으로 연결되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기호와는 매우 다르다. 단순화 되는 그림에 의미가 입혀지고, 개념이 연결되면서 문자가 가능했다. 그리고 사진과 동영상 같은 결과물들은 다시 그러한 기호들에 의해 가능한 기술적 장치들에 의해서 생산되는 그림들이다. 같은 그림이지만, 존재론적으로 매우 다르며 따라서 그 특징 또한 매우 다를 수 밖에 없다.



라슬로 모호이너지 László Moholy-Nagy 와

빌 게이츠 Bill Gates 의 주장을 섞어보면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스마트폰이 (거의) 정확히 구현된다.


라슬로 모호이너지 László Moholy-Nagy 는 앞으로 카메라를 다룰 줄 모르면 문맹이 된다는 주장을 남겼다. 최근의 흐름을 보면 정말 그의 주장이 실현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머니에 카메라 기능이 달린 스마트폰을 넣고 다닌다. 1995년 컴덱스에서 빌 게이츠 Bill Gates 는 지갑형 PC를 제시했다. 매장에서 구매와 결제를 할 수 있고, 학교에서 발표할 수 있는 프레젠테이션 동영상 제작에 연결되어 활용될 수 있는 시스템이다. 모든 예측이라는 것이 그렇듯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세부적으로 정확하게 맞출 수는 없지만, 라슬로 모호이너지와 빌 게이츠의 주장을 섞어보면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스마트폰이 정확히 구현된다.


온라인에서 또한 과거 정착과 농경 사회로의 변화와 비슷한 상황이 자주 벌어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빌 게이츠가 만들었던 코비스 #Corbis 를 비롯하여, 게티이미지 #GettyImage, 셔터스톡 #ShutterStock 과 같은 회사들은 '스톡이미지 stock image'라는 사업모델을 내세워 이미지의 로열티를 받고 있다. 동영상 또한 활용 가능한 소스가 존재하고, 음악 또한 저작권으로부터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음악들 혹은 저렴하게 사용할 수 있는 음원들이 등장한다.


조금 더 세밀하게 들어가보면, 이러한 콘텐츠들을 만들 수 있는 작업도구들이 존재하고, 여기에는 소위 말해 소스 source 가 될 수 있는 다양한 재료들이 존재한다. 필름을 모델링하여 사진의 느낌을 만들어주는 플러그인, 음악을 만들기 위한 루프 loop 와 샘플, 동영상 제작을 위한 샘플 등이 그렇하다.



삼성이노베이션뮤지엄 소개 동영상이 말해주는 것


삼성 이노베이션 뮤지엄을 가보면 영국의 유명한 TV 시리즈 <블랙미러 Black Mirror>와 완전히 반대되는 메시지들로 가득하다. 인류 최고의 혁신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은 다름 아닌 세탁기다. 삼성 이노베이션 뮤지엄의 큐레이션은 바로 이러한 점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 그러나 처음 프레젠테이션이 시작되는 공간에 들어갔을 때 나도 모르게 피식 웃게 된 순간이 있었다. 소개 동영상 타이틀을 보는 순간, 저것은 '애플 Apple 의 동영상 제작툴인 파이널 컷 프로 Final Cut Pro 를 이용해 제작된 동영상일 것이다'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글자의 흐름과 그 타이밍이 정확히 파이널 컷 안에 있는 타이틀 소스와 일치했다. 아마 동영상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쉽게 눈치 챌 것이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이런 것들이다. 초기 국가가 정착 농경의 작물 중 과세가 가능한 작물들, 정확한 토지 측량을 통해 예측 가능한 수확을 하려 했던 것처럼, 오늘날의 디지털 우주 Digital Universe 또한 그렇게 변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아무렇게나 돌아다니며 수집을 해서 사용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밭을 갈고, 구획을 정하고, 거두어 들이는 것들에 과세하기 위해 정해진 시스템인 '농경'이 그러했듯이, 기본적인 틀이 정해지고 오리지널리티는 다소 빈약해지는 콘텐츠 중심으로 변해갈 가능성은 매우 높다. 과거 채집민들의 영양상태보다 초기국가의 농경민의 영양상태는 상당히 부실했다. 영유아 사망률도 채집민들보다 농경민들의 사회에서 더 높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농경사회의 경우 여성의 월경주기, 출산 간격이 훨씬 짧다.

농경사회의 터울은 채집민 사회보다 짧았고,

우리와 가까운 영장류와 비교한다면 훨씬 짧다.

농경사회를 주축으로 한 초기국가의 성공 비결은 사망률보다 높은 출산율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러한 라이센스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다양한 '기본적인 틀'을 사용할 수 있는 이점 또한 얻게 된다. 실상, 농업의 기술이 발달할 수록 얻을 수 있는 식량의 양을 더욱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그리고 어느 정도 가공된 소스들을 이용하는 이러한 제작의 방식은 정확히 '사진의 접근방법'과 매우 유사하다.

농경을 위해 개량된 품종의 씨앗으로 감이 잘 오지 않는다면, 이케아 IKEA 가구를 연상해보자.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영상의 시대가 문자의 시대와 다를 것을 기대하는 것은

태생적으로 통제를 위한 수단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영상의 출신성분'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걱정이 앞선다.

영상의 시대는 과연 정말 자유를 기반으로 할 수 있는 시대일까?

영상의 시대가 사회의 불합리성을 과거 어느 때보다 많이 드러낸 것도 사실이다.

부디 그러한 기능을 잃지 않는 역사를 이뤄갈 수 있길 바란다.



매체와 그 환경은 분명히 변화한다


영상 제작 중심의 소통 환경은 도래할 것이다


과거의 상황을 통해 앞으로의 변화를 대략적으로 유추해보자.


1.

토판을 사용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문자의 해상도가 높기는 어렵다. 파피루스와 벽을 이용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공간적으로 넓어야 한다. 양피지나 대나무 조각, 비단 등을 이용할 때는 글자를 적을 소재의 가격을 고려해 빽빽하게 적을 수 밖에 없다. 물리적 여건으로 인해 정보의 기록과 해석이 매우 어려웠다. 많은 자원과 비용이 들어가고, 전문적인 인력이 있어야만 가능했다.

읽기와 쓰기 과정 자체가 전문가의 영역이었던 셈이다.


2.

중국이 종이를 개발하면서 종이의 질이 많이 중요해지기는 했지만, 양피지나 파피루스 등을 사용할 때보다는 훨씬 보편화되었다. 이제 교육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문자를 읽고, 해석하고 또한 적을 수 있게 되었다. 인류 역사상 대부분의 지역은 이중언어 생활을 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다.


3.

인쇄기가 등장한다. 우리는 금속활자 때문인지 구텐베르그 인쇄기를 시덥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단순히 기술이 아니라 그것들 뒷받침하고 지속가능하게 만들, 네트워크를 형성할 정보를 주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여전히 '먼저 발명했다'는 자뻑에 젖어 깊이 깨닫지 못하고 있다. 독자적인 문자와 인쇄기를 모두 가지고 있었던 우리 '조선의 문명'은 왜 힘을 잃었을까? 단순히 정치적인 문제만은 아니다. 이것은 매우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들이다:

https://www.bhangyoungmoon.com/post/10월-9일-한글날을-맞아-세종은-지식혁명을-원했나



4.

19세기 중반 카메라가 등장한다. 화학, 광학 기술에 근거한 것이다. 인쇄혁명 이후 400년 정도 걸렸다. 이제는 문자 정보 뿐만 아니라 우리가 눈으로 보는 현장을 실사로 기록하는 기술이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관련한 기술은 연금술을 방불케하는 작업들이었다. 대개 초창기 사진작가들은 만물박사 같은 직업군의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 결과물은 엄청나게 나오기 시작한다.

사진 촬영은 전문가의 영역이었다.


5.

한동안 카메라는 집안의 가보와도 같은 존재였다.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애지중지 하며 사용하는 물건이었고, 그 조차도 사실 매우 부유한 사람들이 아니면 개인의 카메라를 손에 넣을 수 없었다. 현상과 인화도 매우 까다로웠기에 쉽게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사진 촬영은 전문가의 영역이었다.


6.

컴퓨터가 집안에 보급되기 시작한다. 디지털 카메라의 일반화의 시점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집안에 컴퓨터가 한 대씩 자리하기 시작한다. 우리나라에서도 2000년 즈음에 국민PC 사업 등을 통해 거의 대부분의 집안으로 컴퓨터가 한 대씩 자리잡고 인터넷 회선이 보급된다. 프린터와 같은 주변기기도 아주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15세기 중반 금속활자, 구텐베르그 인쇄기가 특정 전문 인쇄업자들의 영역에 있었다면, 그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인쇄물들을 집안에서 손쉽게 만들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7.

2002년 블랙베리 스마트폰이 등장했고, 2007년에는 아이폰이 등장한다. 디지털 카메라의 영역은 이제 완전히 일반인들의 손으로 들어간다. 코닥의 디지털 이미지센서가 등장한 이후 이제는 모두가 주머니에 카메라 하나씩은 넣고 다닌다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일차적으로는 어느 정도 콘텐츠화 된 정보가 아닌 현실 세계 속의 정보를 자신의 스마트폰 안에 수집하는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여기까지는 모두가 알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문자를 기본으로 하는 문서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글쓰기의 종말을 주장한다고 해도 문자와 글쓰기가 정말 없어진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이미 ISO9001과 같은 표준화된 프로세스에서도 '문서 documents'를 인정하는 범위는 굉장히 넓어져 있다.



디지털 유인원들이 살아가는 멀티미디어 초원


나이젤 섀드볼트 Nigel Shadbolt 와 로저 햄슨 Roger Hampson 의 공저로 쓰여진 <디지털 유인원 The Digital Ape>, 이 제목을 보자. 요는 이것인데, 과거에는 우리가 생활에서 필요한 도구들의 원리와 제작 방식에 대해 거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 우리 생활과 밀접한 도구들의 작동 원리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기가 어렵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들고 있지만, 디스플레이에서 어떻게 그런 화면이 나오는 것인지, 디지털 이미지 센서를 통해 사진이 어떻게 파일이 되어 다시 디스플레이를 통해 사진으로 보이는지, 그러한 것들을 가능하게 만드는 회로와 반도체들은 어떻게 동작하는지 잘 모른다.


원리적으로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원하는 것을 수집하고, 무리와 나누는 행위 자체는 그대로 이어진다. 이것들은 많이 소비한다고 해서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늘어난다. 그러한 것들은 파급력과 영향력이 되어 사람들에게 미친다. 조회수와 반응들은 곧 가치 value 가 되어 인정받는다.


만드는 입장에서도 비슷한 상황은 벌어진다. 대부분 각 분야의 전문가들, 이를테면 사진작가, 동영상 제작자, 음악가들이 이러한 디지털 제작툴들의 정확한 작동 원리를 저변부터 알고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부분은 어떻게 다루는지를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신석기 시대 초기 정착민들처럼 범람원에 뿌려진 씨앗이 풍부한 식량으로 돌아오는 것을 즐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흐름은 꽤나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애플은 자체 CPU를 개발해 하드웨어를 제작하겠다고 선언했다. 모바일 기기에 사용된 아키텍처가 충분히 발달했고 이제는 멀티미디어 제작에 전혀 부족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바일 게임이나 동영상 편집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단적으로 1960년대 후반 사람을 달에 보냈던 컴퓨터의 저장공간은 2메가 바이트였다.


우리 모두가 사람을 달에 보낼 때 사용했던 컴퓨터보다 훨씬 강력한 컴퓨터를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인류의 첫 비행 60년 만에 사람이 달에 발을 내딛은 사건, 그 이후 50여년 만에 이러한 상황이 벌어졌다. 정보는 엄청난 속도로 늘어나고 있으며, 그 종류도 다양하다. 물론 반도체의 진보 속도가 로켓 엔진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 정보의 공유방식은 엄청나게 변화했고, 사람의 인지와 사고에도 충분히 영향을 미친다.


헝가리 태생의 멀티미디어 아티스트인 라슬로 모호이너지는 “(1930년대) 모든 교육체계는 경제구조의 산물이다(All educational systems are the results of economic structure)”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앞으로 다가올 세상에서의 문맹이란 지금까지 펜이 그러했듯이 카메라를 다룰 줄 모르는 사람들이 될 것(The illiterate of the future will be the person ignorant of the use of the camera as well as the pen)"이라고 주장했다. 앞으로는 문자만큼이나 이미지의 이해가 중요하다는 것이며, 워드나 스프레드시트를 다루는 능력 만큼이나 사진, 동영상을 다루는 기술이 일반화 되기도 할 것이다.


BHANG Youngmoon Photography, Incheon, Republic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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