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hang, Youngmoon

영화 매트릭스: 숟가락은 없다 - 숟가락이 없다고? #2

다른 글(영화 매트릭스: 숟가락은 없다 - 숟가락이 없다고? #1)에서 이 장면을 보며 선문답(禪問答)이 떠오른다면 그것은 선(禪, #zen)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다시 적어보자면, 달마는 칸치푸람(காஞ்சிபுரம், Kanchipuram) 출신이다. 인도의 남부로 현재는 '첸나이 Chennai' 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권역이라 볼 수 있는데, 이곳은 베딕 즉, 아리안들의 산스크리트어가 아닌 드라비다 계통의 언어인 타밀어를 사용하는 지역이고, 이러한 내용들을 중심으로 그가 중국에서 선불교의 조사로, 다양한 전설이 등장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禪, #zen)은 알 수 없는 대화를 주고 받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닿지 않는 곳을 탐색하는 '행위'에 가깝다. 만일 이 대화가 정말 '선문답'이라면 저 꼬마 땡중은 네오에게 숟가락으로 한 대 얻어맞는 것이 결론일 것이다.


Spoon boy: Do not try and bend the spoon. That's impossible. Instead... only try to realize the truth.
Neo: What truth?
Spoon boy: There is no spoon.
Neo: There is no spoon?
Spoon boy: Then you'll see, that it is not the spoon that bends, it is only yourself.

"What truth?"

영화의 초반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의 저서가 등장한다. 네오가 디스크 등을 감춰두는 용도로. 그런데, 이 장면의 등장은 사실상 함정이다. 요즘은 이들을 어찌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데, 워쇼스키 패밀리(?)가 장 보드리야르를 영화 매트릭스 The Matrix 의 중요한 키워드로 삼았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 영화에 접근하는 방식이 애초에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장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르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시뮬라크르란 결코 진실을 감추는 것이 아니다.

진실이야말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숨긴다.

시뮬라크르는 참된 것이다."

- 장 보드리야르 <시뮬라시옹> 中


사실 너머 '그 무언가'를 느꼈다고 해도 그것은 대개 우리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의미는 그것이 구현되었을 때 생긴다. 진실이나 실체를 파헤치겠다는 행위에서 비롯되는 놀라움이란 평소 생각없이 살았던 사람들의 게으름에 가해지는 경고다. 깨달음과는 다른 문제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매트릭스의 빨간약을 운운하며 장 보드리야르를 인용하고 있는데 실상 그들은 군터 안더스 Günter Anders 의 관점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바람처럼 안더스는 가상의 문제를 깨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보드리야르는 나타나는 것을 긍정한다. 가상을 깬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매트릭스의 결론이다.


매트릭스의 결론이 허무하다며 그 안에 아무 철학도 없다고 주장한다면 애초에 접근 방법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영화 매트릭스는 그 나름대로 충실한 근거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매트릭스 해석 사용되는 생각의 틀


조금 심층적으로 이 문제를 조금 더 들여다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지르는 실수는 바로 인과를 단일방향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불교의 관념으로 공(空, emptiness, nothingness)을 생각해 볼 때, 이것은 어떠한 현상세계를 환(幻, māyā)으로 보라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존재론적 인식에 대한 거부이며, 어떤 심층의 혹은 단일한 근본실체란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다. 즉, 모든 것은 상호작용이며, 인과 또한 그러하다. 불경의 표현을 빌려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매트릭스를 대하는 대부분의 태도는 불교적이기보다는 플라톤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애너 메이시마루야마를 인용하여 아낙시만드로스하나의 원형적 실체(proto-substance)라는 개념, 아낙사고라스영혼, 질서, 합리성과 동일시 되는 동력실체(power-substance)라는 관념, 아리스토텔레스분류연역적 사고로 귀착의 문제를 지적한다. 매트릭스를 해석하는 많은 사람들의 관점에 대입해보자면,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환상이며 본질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매트릭스에서는 매트릭스 밖의 세상, 즉 우리가 생물학적 몸으로 직접 경험하며 살아가는 세계를 의미한다. 즉, 이런 방식은 불교적 해석이 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장면을 '선문답'이라고 보는 것은 장면의 메시지 자체를 왜곡시킨다.


그런데 매트릭스의 "숟가락은 없다"라고 하는 장면에서는 "당신이 있을 뿐"이라고 말할 뿐이다. 영화를 보던 사람들이 자꾸만 "마음"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은 역시 매트릭스를 환(幻, māyā)의 세계로, 이 세계를 대하는 나의 마음을 본질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적 접근을 한다면 매트릭스 속의 현상이란 매트릭스와 나의 상호작용이다. 더 나아가서 매트릭스라는 시스템의 존재는 바로 인간과 기계와의 상호작용이다. 후에 아키텍트의 방에서 이루어지는 네오와의 대화는 인간과 기계가 상호의존적 상태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준다.


사람들은 자꾸만 매트릭스 속 상황을 착각이나 환상으로 보려는 경향을 보인다. 바로 지금 계속해서 지적하고 있는 모든 인과의 제 1원인이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트릭스는 그 자체로 완전한 실제이다. 시온의 해방주의자들이 왜 계속해서 매트릭스에 접속해야만 할까? 이러한 설정은 매우 중요한 사실들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설령,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현상세계와 다른 어떠한 세계를 엿보았다고 한들 결국 그러한 세계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왜 자꾸만 본질이나 플라톤의 동굴 같은 해석으로 가게 될까?


인도 철학에서도 이 문제는 그리스 철학과 비슷한 문제에 빠진다. 베다 시대에서는 이후 다르마(dharma)라 불리우는 어떠한 관념을 리타(ṛta)라고 불렀으며, 변화는 이 현상들 속에 내재하는 잠재적인 힘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잠재적인 힘을 스와다(svadhā: 고유한 힘)라고 불렀으며 결과를 산출하는 원인 안에 내재하는 힘 또는 특성으로 여겨진다. 외적 요인을 요구하는 그리스 철학이나 이후 유럽의 교부철학과는 거리가 있기에 이것을 매우 다르게 본다는 것은 부적절하다. 왜냐하면, 이 또한 현상의 제 1원인을 찾고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다른 글(영화 매트릭스: 숟가락은 없다 - 숟가락이 없다고? #1)에서 계속해서 다루었던 것이 바로 이 언어의 문제였다. 인도는 기본적으로 언어에 집중한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는 북방에서 이주한 아리안들의 영향이다. 이 이주사를 다루면 내용이 너무 많아지지만, 기본적으로는 카스피해-흑해 초원에서 살던 사람들이 오랜 세월에 거쳐 이주해 오는 역사와 관계가 깊다. 이들의 이동 경로 등을 통해 오늘날 유럽, 인도 그리고 이란의 언어들이 하나의 언어에서 기원했다는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리스의 경우 초원에서 아나톨리아 - 크레타 - 그리스로 동선을 그려보는 것이 어렵지 않고, 인도의 경우 파키스탄 지역을 거치는 남진, 터키와 이란을 거치는 남진의 동선을 그릴 수 있다. 창세기와 신명기 등에서도 등장하며, 후대 인도의 신들의 이름을 유추할 수 있는 '밋타니'라는 왕국 또한 중요하다.


이들의 특징이 무엇일까? 바로 인도-유럽어 Indo-European Language 라 불리우는 거대한 어족의 화자들이라는 것이다. 사고의 심층화, 고등화 그리고 네트워크와 의사소통의 핵심에는 바로 이 '언어'가 있다. 그렇다면 언어의 구조는 사고방식에 엄청나게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의 경우에도 '깨달은 자'인 붓다 이후에 일어나는 혁신은 상당부분 인도유럽어 계통의 언어 지역이 아닌 드라비다어족 지역에서 일어나기도 했다. 나가르주나의 출생지로 여겨지는 인도 남부 지역이라는 곳은 오늘날 '텔루구어' 지역이며, 禪宗의 조사로 여겨지는 달마 대사의 경우 칸치푸람 출신으로 보고 있는데, 이 지역은 '타밀어'를 사용하고 있다. 텔루구어와 타밀어 모두 드라비다어족에 속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인도 철학과 그리스 철학의 인과관이 유사한 것은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다. 언어의 역사적 맥락을 통해 어떻게 사고방식이 발생하는지에 관해서는 한 작품에 대해 동영상을 만들어 설명한 것이 있으니 관심있으신 분들께서는 한 번 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하다.





강조하고 싶어지는 매트릭스의 메시지


왜 우리는 매트릭스 The Matrix 라는 영화를 보면서 자꾸만 '플라톤의 동굴'을 생각하게 될까? 몇 번을 보아도 매트릭스의 메시지는 본질과 현상을 가른 그리스 철학에 대한 반발로 보이는데 말이다. 그것은 자꾸만 '기득권이 나를 속인다'는 오늘날 많은 이들의 정치적 사고방식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가 초반에 나오는 것만 보아도, 영화는 어떠한 현상세계 즉, 매트릭스가 비본질적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드리야르의 저서가 등장하는 초반 장면을 통해 매트릭스와 본질세계를 연결하고 싶어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들이 보드리야르를 읽지 않았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유튜브'에 등장하는 리뷰들이 실상 보드리야르가 아닌 안더스(Günter Anders)의 관점이기 때문이다.


매트릭스는 애초에 환(幻, māyā)의 미망을 넘어 진실의 세계로 가자는 주장을 하고 있지 않다. 빨간약과 파란약을 내밀며 인류를 구원하자는 모피어스는 신실한 믿음을 보여주지만, 그 자신은 그다지 신뢰할 만한 행동을 보여주지 못할 때가 있다. 또한 기계들과의 협상이라는 매트릭스 3부작의 결론은(4부가 나온다고 하니 어찌되나 보자) 모피어스가 상상했던 것과는 매우 달랐던 결론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시온'에 남겨진 사람들은 살아남는다. 빨간약파란약을 내미는 모피어스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몰랐다.


네오(Neo)의 역할은 이미 셀 수 없이 많은 반복을 통해 아키텍트와 만났고, 셀 수 없이 매트릭스를 업데이트했다. 그리고 모든 네오는 그때마다 조금씩 반응이 다르다. '네오 Neo'가 One의 애너그램적 변형이라는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The One 이라는 설정 때문에 메시아니즘적 접근 그리고 윤회적 세계관과 윤회의 주체인 장식(藏識)으로 접근한다면 이 또한 사실 불교적인 세계관이 되기는 어렵다. 숙명론이라는 것 자체가 불교의 핵심과 너무나 맞지 않는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 영화는 그 나름 자신에게 충실한 근거를 가지고 진행될 뿐이다. 자꾸만 불교적 해석의 틀을 강요하는 것은 영화의 메시지가 불교적 측면을 포함한다고 해서 해도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정해진 The One 이 필요한 것이 워쇼스키들의 생각일지, 대중영화의 한계성일지는 직접 묻지 않는 이상 알 길이 없다.


영화의 매우 불교적 측면이라고 한다면 이것이다. 영화는 매트릭스를 불필요하며, 벗어나야 하는 세계로 보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네오가 매트릭스 밖에서도 기계들을 세우는 순간은 바깥 세상이 특별히 어떤 '본질적 세계'로 받아들여져서는 안된다는 메시지인지도 모른다. 이미 세계는 인간과 기계가 매트릭스라는 상호작용의 장(field)을 이용하지 않으면 서로 스스로를 존속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인간에게도 기계들에게도 생존을 위해서는 매트릭스가 답인 세상이다. 아키텍트의 방에서 등장하는 네오의 수를 보면 이미 기계들이 매트릭스를 구축한 것은 굉장히 오랜 세월이 지난 상태다. 이러한 상호관계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스미스 요원(Agent Smith)의 존재야 말로 어찌보면 가장 문제였다. 고효율, 말끔한 질서, 단일화, 단일기원 등의 심볼 같은 스미스 요원이 인간과 기계 모두에게 위협이 되는 상황 설정은 매트릭스의 메시지 중에서도 매우 핵심적인 요소인 것이다.



결론


숟가락이 있고 없고의 문제를 두고,

우리가 숟가락을 환상으로 정의하고 '본질의 세계'를 보려 한다면 영화가 애써서 만든 세계관과 메시지를 모두 놓치는 것이다. 그러한 접근은 선문답도 아니고, 불교적 세계관도 아니며, 매트릭스의 세계관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영화나 저 옛날 인도의 붓다가 깨고자 했던 번뇌의 근원인 제 1원인과 존재론적 집착에 대한 도전을 하라는 메시지와도 거리가 멀다.


한차원 높은 혹은 더 본질적인 세계가 있어

우리는 그 위에 비춰진 투사된 상과 같은 세계에 산다는 세계관의 눈으로 보면

이 모든 것이 계속해서 오류에 빠질 뿐이다.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다.

인간과 기계가 있기에 매트릭스가 있다.

BHANG Youngmoon Photography, Incheon, Republic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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