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hang, Youngmoon

오늘날 교회의 근본적인 문제는 과거 어느 때와 같이 주제파악을 못하는 것

사회적 이슈가 등장할 때마다 교회가 口舌數에 오르는 까닭은 근본적으로 주제파악을 못하는데에 있다. 자신의 부덕함을 생각하기 이전에 기본적인 지식정보를 이용해 타인에 대한 비판을 가하는 습관적 행동이라는 것이다. 느헤미야의 성전재건 이후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열과 성을 다해 율법을 배우고 익힌 사람들이 등장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한 시기 동안, 400년의 계시가 끊어지고 사람들은 그 안에서 율법에 따라 살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모세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는 널리 퍼졌다. 그러나 그렇게 열심을 내었던 사람들이야 말로 세례 요한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욕설을 들어야 했으며, 예수님의 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문제와 동일한 까닭이다. 자신의 부덕함을 생각하기에 앞서 지식을 통해 타인을 비판하고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행동을 말한다.



그러나 정작 동일한 상황이 닥쳤을 때 사람들의 행동은 그들의 주장과는 많이 달라진다. 이 점은 복음서에서 율법을 통해 예수님과 힘겨루기를 했던 모든 사례들에서 계속해서 지적되고 있는 상황이다. 소위 자신과 다른 타인의 생각에 '아니꼬움'을 표출하는 것이 자신들의 도덕성을 지키고, 정결함을 표출하는 것이라 혼동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어부나 세리나 의사나 직종에 관계 없이 자신의 제자들을 삼았던 것이나, 함께 잔치에 참여하고 술을 마시며 격없이 지내는 모습은 '정결함'과는 거리가 먼 인상을 주었다. 율법학자들과 정통파 인사들은 이러한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결국 자신들의 논리로 격파되지 않는 예수의 행동을 처벌하기 위해 그들은 로마의 힘을 빌려 예수를 처형한다. 자신들의 당위성을 위해 오늘도 미국과의 관계를 내세우며 분노를 표출하는 모습이 그때와 너무나 비슷하기에 쓴웃음이 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빈번한 분노의 표출,

자기기만을 일삼는 것은

곧 회개할 마음이 없는 것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말한다면 그 세상과 나는 완전히 별개의 존재일까?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한다면 나는 잘못이 없을까? 이런 질문들을 다각도로 던져보며 스스로를 돌아보면 완전무결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이것은 각자가 가진 극단적으로 다른 정보를 기준으로 정합성을 이뤄내려다보니 발생하는 문제다. 서로 상대가 무지하기 때문에,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오류를 범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상태면 이미 대화는 이뤄지지 않는다.


일찍이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으로 정리되는 마태복음 속 긴 설교를 통해 "원수를 사랑하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던졌다. 그리고 유사한 메시지를 대하는 중국의 고전들을 보며 우리가 얼마나 솔직하지 못한지를 생각하게 된다.



이덕보원 以德報怨 을 논하다


문자를 좀 아는 사람이라면 以德報怨이라는 말 정도는 한 번 들어보았을 것이다. 논어 헌문에 보면 누군가 공자에게 "以德報怨 何如?"라고 묻는 장면이 등장한다. 노자 63장에도 보원이덕 報怨以德 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니, 춘추전국시대의 지식인이라면 대개가 알고 있는 내용이었던 셈이다. 문자적 의미나 해석을 논한다면 우리는 다시 바리새인의 문제에 빠질 수 있다. 그러지 말고, 왜 사람들은 이것을 논하였는지 생각해보며 그들의 마음의 문을 열어보는 것으로 방법을 바꿔보자.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 누가복음 10장 25, 26


동일한 문제가 여기에서 등장한다. 영어에서는 慣用句로 쓰일 정도로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 The Good Samaritan 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 이야기의 구조적과 상징적 의미들은 설교나 주석을 조금만 읽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문제다. 우리가 집중할 부분은 바로 "어떻게"라고 하는 부분이다.


많은 경우 교회 강단의 설교는 예수와 율법학자들, 바리새인 등을 대적적으로 설정하여 가르치는 경향이 강하다. 그들이 "예수를 시험하여"에서 이미 감정적으로 발끈한 상태로 접근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나 세대가 올라간다면 이러한 경향은 더 강해질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에게 '싸가지 없는 것들'의 행동으로 느껴질 수 밖에 없는 정서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당대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는 완전히 반대 상황에 가까울 수 있다. 우리가 예수의 직업으로 생각하는 '목수'는 우아한 예술가적 이미지라 이상할 정도로 정착되어 있지만 사실 이것은 공사판의 토목공에 가까운, 소위 막노동 꾼이다. 그러나 고향 사람들이 '목수의 아들'이라고 예수를 칭한다는 것은 업신여기는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을 가능성 또한 매우 높다. 그러니 그러한 예수의 시선이 당대 사람들 특별히 약자들의 시선에 더 적합할 수 밖에 없다. 2천 년 전 긴 로브 robe 차림으로 동전을 흔들며 성전에 헌금하는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자신의 입장과 체면이 더 중요한 교회의 입장과 다를 바 없다. 그러니 그들은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자신이 흠잡을 곳 없는 바람직한 사람이라는 점을 계속해서 드러내기 위해 타인에 대한 비난과 예수에 대한 시험을 항상 했던 것이다.


그에 반해 오히려 공자와 제자들의 대화는 이보다 긴장감이 적다. 그러다보니 자신들의 부족한 부분에 대해 스승과 논의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점에서 솔직한 측면이 더 많이 보인다. 율법교사는 자신이 율법적으로 옳은 길을 가고 있음을 표출하기 위해 예수에게 메시지를 던지지만, 제자들은 공자에게 이덕보원의 실천 앞에 무너지는 자신들을 솔직히 드러낼 수 있다.


더군다나 고대 중국에서의 논의는 더욱 자유로운 양상을 보인다. 동일한 메시지를 가지고 학파들이 해석하는 방법도 매우 다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을 논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이슈는 해석의 문제가 아니다. 바로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다.



안다는 것과 살아낸다는 것

즉, 실천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공자의 제자들이 직면한 문제는 이것이었을 것이다. 이덕보원하는 것은 어려운데 스승님은 어찌 생각하고 계실까?

이에 공자는 매우 받아들일만 한 대답을 던진다.


子曰、

何以報德。 以直報怨、以德報德。

원한은 직()으로 갚고, 덕은 덕으로 갚는 것이다


논어 전반은 물론 논어 외에서 발견되는 공자의 모습은 항상 질문과 질문자에 따라 대답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소위 "맞춤형" 답변이다. 모든 문제와 논제는 상황적 맥락을 통해 이해하는 방법 또한 매우 달리할 수 있다. 이것은 매우 현실적인 접근이며, 나아가서 매우 겸손한 태도다. 우리가 어떠한 변하지 않는 정체성을 가지고 불굴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만은 없다는 현실감각이 묻어난다.


내가 이야기 하고 싶은 교회의 문제란 바로 이것이다.

공자는 원한의 문제에 있어서 현재 자신의 모습을 직시할 것을 권면했다. 직(直)으로 갚는다 할 때는 내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진다. 내가 원수를 품을 품성이 된다면 덕으로 갚을 수 있는 것이고, 내가 원수에 대한 분노로 가득하다면 보복을 하는 것이 된다. 말 그대로 맥락의 확장을 통해 수용과 해석의 방법도 달라진다.


그러나 교회의 입장은 매우 다르다. 그들은 매우 이상적인 메시지를 던지며 하나하나 실천하기 어려운 성경의 율법적 이상을 늘어놓는다. 결국 자신이 그러한 입장에 처해보지 않은 오만한 태도로 일관할 수 밖에 없다. 바울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했을 때는 강단에 선 사람, 편지를 쓰고 있는 자신도 포함되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같은 로마서 7장에서 "사망의 몸"을 언급하고 있으며, 8장으로 넘어가며 "성령"과 "은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고대 중국의 학자들이 실천이 어려운 부분을 놓고 다양한 해석을 하고, 논의를 해온 것이 소위 말하는 중국 고전과 주석의 역사의 한 축이 될 것이다. 그들은 보원이덕과 같은 이상의 실천이 어렵다고 보았다. 한 제국 시대에는 문제의 싹을 미리 없애버리라는 방향으로 주장했고, 왕필과 같은 유교적 관점을 가진 학자들은 문제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내놓았다. 이 내용을 두고 왕필이 하는 해석은 원한의 종류를 나누고 정치적 맥락을 연결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상의 실행은 어렵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오늘날 종교는 전세계 어디서나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우리 사회 또한 마찬가지다. 이상과 실천의 간극을 인지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현실적으로 처할 수 있는 문제를 성직자들이 슬그머니 외면하고 있다보니 우리 사회에서 그것을 지적하는 것은 되려 영화나 소설과 같은 내러티브 중심의 예술로 그 역할이 옮겨갔다.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이 베풀어지지 않았을 때, 차마 내가 믿는다고 주장하는 하나님을 공격할 수는 없으니 타인을 비방하려고 하는 태도로 일관하는 것을 보면 그 옹졸함이 옆동네까지 전해질 기세다. 더군다나 성경이 가르치는 가르침을 '살아내는' 실천의 단계에 두는 것이 성직자나 직분자들 자신들에게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어려우니 타인의 문제를 지적하여 시선의 방향을 돌리는데 혈안이 될 수 밖에 없다.


되려 실천의 어려움을 자각하고,

"이거 잘 안되는데요..." 라고 공개적으로 논했던 것은 교회 밖의 사람들인 셈이다.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 마태복음 5장 44, 45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동일하다는 것은 상벌과 같은 원초적 문제가 아니다. 천인공노할 악인도 숨을 쉬는 동안에는 아침에 뜨는 태양과 지구상의 공기를 통한 호흡으로 살아간다. 땅을 적시는 비 또한 열심히 살고 있는 사람은 물론 불의한 자에게도 내려 마실 물이 된다.

누구를 내세우고 누구를 저주할 것인가를

스스로 판단하려는 것이야 말로 예수의 가르침과 가장 다른 태도라 할 수 있겠다.


지구가 멸망할 때는 열심히 환경운동을 한 사람이나,

매일 고기를 먹고 일회용품을 사용한 사람이나 똑같이 죽는 것이다.

판단은 인간에게 주어진 문제와 권한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공의이며 또한 사랑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두고 예수께서 내놓으신 이미저리 imagery 들을 살펴보면

오늘날 교회가 사회를 비판하는 것이 왜 문제인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BHANG Youngmoon Photography, Incheon, Republic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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