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hang, Youngmoon

온라인 도슨트 #3 - 수면 Surface




VIDEO TRANSCRIPTIONS


바다는 지구상 생명의 상징입니다. 물 그 중에서도 바다는 오랜 옛날부터 생명과 관련된 상징이었습니다.

바다는 지구의 온도를 조절하고, 바다 속 식물성 플랑크톤은 대기 중 산소의 70% 가량을 만들어 냅니다.


자연상태에서 지구상의 에너지는 태양에서 공급됩니다.

지구상 생명체들의 활동은 태양과 지구 환경간의 상호작용의 결과들입니다.


저는 제가 살고 있는 인천에 인접해 있는 서해 5도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촬영했는데, 대략 3년 정도를 오가니 제가 원하는 관점의 사진들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사진이 그 중 하나입니다.


저는 태양과 바다의 상호작용이 지구상 생태계를 이루는 기본이 된다는 사실을 사진에 표현해보고 싶었습니다. 이 작품은 원래 4장의 연작으로 구성되었던 사진 중 하나를 고른 것입니다. 시각 예술이라는 관점에서 사진은 빛 자체를 다루는 작업이고, 그렇기 때문에 본다는 행위를 통해서 우리의 감각기관 또한 다양한 상호작용을 통해 발달해 왔다는 점이 사진을 통해 표현됩니다.


우리가 본다는 것은 태양 에너지에서 가장 강한 부분인 380~770나노미터 파장을 이용한다는 말로 바꾸어 볼 수 있습니다. 여기 즉, 380~780나노미터 영역이 바로 가시광선입니다. 우리의 눈이 가시광선을 통해 세상을 본다는 것은 가시광선이 보이는 빛을 정의하는 개념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태양의 특징이 우리의 눈이라는 감각기관을 정의하기 때문입니다. 태양 에너지의 효율적 활용의 결과물이 바로 우리가 세상을 보는 빛의 파장을 결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시광선’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것입니다. 가시광선이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감각기관을 형성해 온 상호작용이 가시광선을 정의한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제 작품 전반을 이해하시는데 아주 중요한 관점입니다.


이렇게 보면 지구상 식물의 잎이 왜 대부분 녹색인지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녹색은 이 가시광선 가운데 에너지 효율이 제일 낮은 파장에서 만들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다수의 식물은 붉은 쪽 영역, 적외선 그리고 푸른쪽 영역, 자외선 등을 에너지로 사용하고 녹색은 버리도록 발달했습니다. 녹색을 안쓰려면 반사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식물이 녹색을 많이 띄는 이유입니다. 지구상 생명체 거의 모두가 태양과의 상호관계 속에서 살아 숨쉬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기본적인 감각 중 하나인 시각(視覺, visual sensation)은 태양과 우리의 상호작용을 통해 획득된 감각입니다. 우리의 시각은 태양에너지를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향으로 발달했고 우리의 인식도 효율적 생존을 위해 발달해 온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정확성 그 자체와는 거리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작가노트

  • <케냐 우파니샤드>에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의해 눈들이 본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이는 <우파니샤드> 전반에 나오는, 또한 고대 인도 논리학의 주류를 이루는 방식의 근간이기도 하다. 즉, ‘본다’는 것은 눈에 의한 것이 아니라 눈으로 하여금 보도록 하는 더 근본적인 것이 있다는 사고방식이다. 이는 곧 현상과 본질을 나누어서 설명하는 방식의 전형이다.

  • 이것은 사실 각 감각기관에는 '이러한 기능이 있다'고 보는 것과 다르지 않은 사고 방식이다.

  • 현대적 입장에서 보면 각 기관에 특정한 기능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 우리의 몸, 감각기관들에 특정한 기능이 있는 것이라고 보면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 "이것에 이 목적이 있다"가 아니라 그것이 가져온 방향 그리고 그 과정을 알고자 하는 것이 중요하다.

  • 보고자 한 어느 지점에서부터 보기 위한 과정이 일어났다.

  • 우리가 본다는 것은 태양 에너지의 가장 강한 부분, 해당하는 빛의 파장을 이용하는 것이다. 즉, 본다는 것은 생물체의 환경여건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활동이 될 수 있다.

  • 우리가 본다는 것을 본다고 하고, 듣는 것을 듣는다고 하지만 이것은 정해진 것이 아니다. 듣는 것을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보는 것을 듣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음파의 전달 속도는 훨씬 제한적이기 때문에 듣는 것이 보는 것으로 인식될 환경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각각의 감각은 우리 환경여건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처음부터 보기 위해, 듣기 위해서가 아니다.

  • 우리의 감각은 환경과의 조화이며, 환경과 나 또한 불연속적으로 양분(兩分)될 수 없다.

  • 이것은 자칫, 내가 곧 세계이며 세계가 곧 나다 혹은 하나는 전부이며 전부는 하나다 같은 생각으로 이어지기 쉽다.

  •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그 발상에서부터 각각을 정의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나 자신은 환경의 변형이며 또한 개체적으로 인식될 수 있다. 환경과 내가 불가분임을 이해한다는 것은 내가 곧 세계이며, 세계는 곧 나라는 의식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라진다.

  • 중요한 것은 "이것은 A다" 혹은 "이것은 B다"와 같은 단순 명료한 결론을 유보할 줄 아는 인내와 지혜다.

  • 단순 명료한 결론은 이해를 전제로 한다. 당연한 이야기다. 그러나 그만큼 '통제'를 목적으로 하기도 한다. 이 또한 사실이다.

  • 아인슈타인은 "단순하게 설명할 수 없다면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다 If you can’t explain it simply, you don't understand it well enough"라는 말로 유명하다(리처드 파인만도 비슷한 언급을 했다)러나 그는 또한 "이론은 가능한 만큼 간결해야 한다 Theories should be as simple as possible, but not simpler."라고도 했다.

  • 단순한 설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그만큼 단순화 과정의 무게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들은 단순하게 설명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어떤 것들은 단순화 과정에서 넓게 펼쳐지는 경우도 있다. 어느 쪽이든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내력을 필요로 한다.

  • 2018년 <다면체탐구>라는 타이틀로 연작을 구상했을 시점에는 <우파니샤드>의 사상들을 중심으로 작업의 토대를 놓았다. 그러나 그 생각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 2018년은 국제 세미나 사진 촬영 작업 등을 통해 세계적인 석학들의 강연을 눈앞에서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당시 나는 작품 구상을 위한 몇 가지 생각에 빠져 있었는데, 불교의 유식사상이 그 중 하나였다. 이후에 우파니샤드를 구체적으로 접하며, <찬도그야 우파니샤드>에 등장하는 문장을 중심으로 작품을 구성했다. 흙에서 그릇도 만들어지고, 찻잔도 만들어지고, 때로는 집과 성벽도 만들어지지만 이 모든 것이 흙에서 왔다는 관점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이치다.

  • 이 관점에서 2019년 사진연작 <다면체탐구>를 만들어 전시했다. 이화여자대학교와 헨리-루스 재단이 주최/ 주관하는 국제세미나 ELIS의 STC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연작을 발표했다. 재미있게도 이 연작을 전시할 무렵인 2019년, 인천이 동아시아 문화도시에 선정되면서 한-중-일 작가들과 교류할 기회를 얻었고, 그렇게 다른 전시를 진행할 수 있었다.

  • <2019 인천동아시아문화도시 사진영상페스티벌> 대표작가전에 출품하면서 불과 몇 달 전의 생각을 뒤집었다. 사실 나는 <다면체탐구>를 전시하고 싶었다. 주최 측과의 논의 중에 다른 작품들을 걸기로 결정하게 되는데, 이것이 나에게는 엄청난 전환점인 셈이다. 실상 며칠 만에 바로 이전의 관점을 뒤집어 작품을 구성했다. 돌아보면 다행이라 생각한다.

  • 재미있는 것은 이 <찬도그야 우파니샤드>는 많은 이유에서 생각의 전환점에 있는 책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내가 작품과 더불어 사고의 전환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맥락에서 보아도 그러하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 이를테면, 불살생(不殺生, ahiṃsā) 전통의 뿌리를 생각해 볼 때 두 가지 관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하나는 그것이 '베다'의 내부적 전환이라는 주장이다. 다른 하나는 슈라마나(沙門) 운동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불살생 사상의 실질적은 뿌리는 자이나교와 불교가 된다.

  • '불교'의 근간이 되는 '연기(緣起)'의 기본, 불살생의 언급이 <찬도그야 우파니샤드>에서 먼저 등장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발 주장도 만만치 않다.

  • 더군다나 <우파니샤드> 등에서 불교나 자이나교의 개념들이 먼저 등장한다는 것은 일종의 언어적 유사성이 아닐까 싶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러한데, 하나는 불교와 자이나교와 베다에서 받아들이는 방법이 많이 달라보인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우파니샤드>를 중심으로 이러한 분석을 해볼 경우 전승되는 문장들의 연대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 우리가 세상을 시각기관으로 수용하는 과정은 가시광선이라는 파장을 이용해 눈으로 빛을 수용하고 뇌로 해석하는 과정이다. 이것이 소위 '본다'는 행위의 정의가 될 것이다.

  • '본다'는 행위 그리고 그 능력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환경과의 복잡한 상호작용의 결과다.

  • 특별히 태양 에너지의 특징이 우리의 '본다'는 행위를 정의하는데 아주 큰 역할을 한다. 만일 다른 항성계에서 생물이 살고 있다면 우리와는 매우 다른 파장을 이용해 세상을 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왜냐하면 인간의 언어 '가시광선'이란 바로 태양계 지구상에 살고 있는 우리의 '가시광선'을 정의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 시각기관의 발달은 생명체가 속한 항성계의 항성이 갖는 에너지 특징이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따라서 다른 항성계에 지적 생명체가 살아서 우리와 소통한다면 일단 우리와는 매우 다른 파장을 이용해 세상을 보는 생명체라는 점을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우연히 우리 태양과 유사한 특징을 지닌 항성계라면 다행이겠지만.

  • 이렇게 보면 우리는 굉장히 다채로운 상호작용 interaction 을 통해 우리 자신을 형성해간다.

  • 불교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연기 pratītya-samutpāda'가 이러한 사실에 관한 매우 깊은 통찰임을 느꼈다. 처음 그러한 내용을 보존한 '빠알리어' 표현을 보면 "이것이 일어날 때 저것이 일어난다"는 문장으로 정리된다. 이 말을 나의 사진 표현에 연결해보면 이렇다. 태양빛이 있을 때 우리가 세상을 본다. 이것은 밤과 낮 같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 조건성이 저 조건성을 만든다는 연쇄반응을 나타낸다.

‘idaṃ sati ayaṃ bhavati’ (Skt., when this exists, that arises)

A → B (when condition A exists, effect B arises)

(negation) -A → -B (where condition A does not exist, effect B does not arise)

  • 우리가 빠지기 쉬운 함정은 바로 '어떠한 정의 내릴 수 있는 것이 있고 세상은 그렇게 구성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어떠한 원리의 규명 자체는 중요한 시도가 되겠지만, 반대로 말한다면 그것은 되려 오류의 누적일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 뉴튼(Issac Newton)이나 데카르트(René Descartes) 모두 본래 존재하는, 독립적 존재에 관한 생각을 내놓았다. 재미있는 것은 훗날 데카르트 학파의 사람들은 뉴튼 역학을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그것은 무엇이라 규명되지 않는 '중력'을 놓고 질서를 상정한다는 점에서 뉴튼의 역학은 마술적이고 미신적이라는 주장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데카르트는 '솔방울샘'과 같은 기관이 영혼의 세계와 우리를 연결해준다는 터무니 없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중력에 대한 명확한 규명은 여전히 불분명하지만 철학자들은 의외로 말도 안되는 주장으로 수 백 년 혹은 수 천 년을 먹고 산다. 솔직히 <플라톤 다면체>가 말이나 되는 소린가? 기하학적 논증을 우주질서에 갖다 붙이는 용기 만큼은 훌륭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재(實在)들에 대한 양자역학 적 관점은 우리 현대인들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기대 이하로 영향이 미미하다. 지난 20년에 걸쳐서 우리는 양자적 실재들 사이의 관계가 자주 그 실재들의 고립된 존재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훨씬 더 참되다는 이해에 도달했다." - <불교와 양자역학> 빅 맨스필드 Vic Mansfield

  • 나가르주나(Nāgārjuna, 龍樹)의 <중관사상(中觀思想)>은 내개 매우 중요한 관점을 가져다 준 사상이다.

  • "그 논증은 우선 그들의 주장이 진리라고 간주한 다음, 그들이 사실과 모순에 봉착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실재론자의 유혹의 한 표현인) 신비한 가변적인 이론들을 논파한다." - 빅 맨스필드 Vic Mansfield

  • <불교와 양자역학>의 저자인 '빅 맨스필드'는 '귀류법'을 언급하고 있다. 그가 '귀류법'을 언급한다는 사실은 그가 중관사상의 대표적인 텍스트인 나가르주나의 <중론>을 알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사실 이 귀류법은 중관사상의 고유한 논증법이 아니다. 고대 인도의 전통논리학에서 '쁘라상가 prāsaṅga 논법'이라 하는 방법이다.

  • '쁘라상가'는 바라지 않는 것이 결과가 된다는 의미가 있다.

  • "상대의 주장을 임시로 인정하면 대론자 자신에게 바라지 않는 결론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대론자의 주장을 부정하는 방법이다." <중론> 해설 편 (가츠라 쇼류, 고시마 기요타카, 배경아 譯)

  • 중관사상 전반에서 적극적으로 어떤 '진리' 혹은 '진실'이라는 주장을 내놓는 경우는 드물다. 그렇지만 <중론>의 18장에서는 희론의 소멸이 해탈로 연결된다는 도식이 등장한다. 즉, 나가르주나의 지향점은 희론의 소멸이 해탈로 연결됨을 의미한다(<중론> 해설편, 가츠라 쇼류, 고시마 기요타카).

  • 나는 이러한 방향성을 받아들여 작품에 표현하고 싶었다. 작업을 위해서는 하나의 출발점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의 감관 전반이 상호작용을 기반으로 형성되어 온 역사를 지녔다는 점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 이것은 어떠한 단편적인 정의를 거부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 본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독자적이고 고유한 능력이 아니라 말 그대로 '주어진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우리가 태양빛 아래에서 '본다'는 능력을 획득한 것이 우리의 '본다'를 정의한다.

  • '원래 이렇게 보는 것'을 상정하고 풀어가기 시작하면 우리는 우리 감각기관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게 되고 우리가 보는 것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이것은 도리어 우리가 우리 자신은 물론 주변 환경과 그 관계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 감관과 우리 의식의 의미를 먼저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을 왜곡하게 될 수 밖에 없다.

  • 이쯤되면 특정한 조건 아래에서 획득된 감관을 통해 어떠한 우주적 진리와 통찰을 소유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자체가 망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그렇다.

  • 때문에 어떠한 사상이나 종교는 때로는 일원론적 진리를 동원해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특정한 기준을 정하지 않으면 불안한 것이다.

  • 시작, 근원, 근본을 정하면 모든 것을 결정론적으로 보게 된다. 도래할 결정론적 사태가 인간에게 불가지적이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상황에 대한 모든 근거를 들이 댈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편리한 방법이다.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 가다보면 자신이 옳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 근거 없는 권위를 내세울 수 밖에 없다.

  • 인류의 역사란 바로 이렇게 근거 없는 권위를 내세우는 역사였는지 모른다. 그렇게 조상들은 신이 되고, 신들은 왕을 세우고, 왕은 자기 권력 아래에 있는 모든 사람을 소유물로 여겼다.

  • 근거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우주를 시작시켜야 한다.

  • 근거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하늘과 땅을 만들고 천체에 권위를 부여해야 한다.

  • 인류가 국가화 하는 시점과 '지고신 (至高神)'이 등장하는 시점은 역사적으로 얼추 맞아들어간다.

  • "우주에 시작이 있다" 혹은 "우주에 끝이 있다"는 말들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려는 것은 근본적으로 타자에 대한 억압을 행사하고자 하는 발상이다. 더군다나 '시작과 끝'을 논하는 것은 실상 원숭이가 나무 열매를 따먹기 위해 고민하는 것과 그 뿌리가 같은 생각에서 왔다.

  • 깊이 생각해본다면, 우리가 가진 시간(時間)의 심상 자체가 생물의 필요에 의한 것이다. 오늘날 첨단 과학, 최전선의 지혜들은 시간이라는 것이 우리의 생각과는 매우 다른 것이라고 말해준다 - 심지어는 없다고 하기도 하는데, 없다고 하는 것은 '변화'에 대한 설명의 의무는 물론 '없다'에 빠진 일종의 편견이다.

  • '없다'를 내세워 심오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