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같은 동네에서 자란 서너명이 앉아서 대화를 나누어도, 서로가 생각하는 것이 매우 다르고, 가치관과 꿈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사고방식이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종종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나는 도무지 네가 이해가 되질 않는다"라는 표현도 쓰게 된다. 한 지역, 어느 나라, 어느 대륙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정체성이라는 것은 분명 존재하지만 그것이 판단의 기준이 되기는 어렵다. 서너명만 앉아 있어도 서로가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할진데,
단 며칠을 머무는 이곳 인도는 '아대륙 subcontinent'이라 불리울 정도로 넓은 곳인데다가 복잡한 문화들이 얽혀 있어 통일된 정체성으로 통칭하는 것이 불가능한 지역이다. 헌법이 인정하는 언어만 22개가 있는 나라를 생각하다보면, 근대국가제도가 얼마나 불완전한 체제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바라보는 세상 역시 '나의 투영 the reflection of myself'일 수 밖에 없다. 인상 impression 은 결국 내가 선호하는 것 혹은 내가 선호하지 않는 것으로 나뉜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는 좋다/ 나는 싫다가 아니라 자신의 판단에 보편성을 부여하기 시작한다. 특정 지역, 특정 국가의 정체성의 대표성 조차 갖추지 못한 자신의 판단으로 거대한 타자를 결론 짓는 것은 오래된 격언에서 말하듯 "무지에서 비롯된 용맹"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근본에 가까운 원인들을 찾아내면 내 눈에 보이는 상황들이 이해되기도 한다. 결국 바울의 말처럼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고전 13:9)"할 수 밖에 없기에 온전한 것을 얻을 수 있는 원리를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바울은 이를 타자에 대한 '사랑'에서 찾았던 것 같다.
인애는 앎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혐오는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자비가 앎에서 비롯된다면 바르게 알기 위해 끊임 없이 노력해야 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지 않나 싶기도.
누군가 어느 곳에서 그곳에 대한 '판단'이 생긴다면
그것은 그곳을 본 것이 아니라 그곳에 투영된 자신을 본 셈이다.
자신의 생각, 자신의 가치관, 자신의 꿈이 반사된 것을 본다.
자기애, 자기혐오를 다른 곳에 투영해 동시적으로 보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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