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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마(業, Karma कर्म)의 수용사 - 온라인 전시 프로젝트 2번 On-line Exhibition Project No. 2, 다면체탐구 - '카르마'

On-line Exhibition Project No. 2

온라인 전시 프로젝트 제 2번

  • 사진연작 '다면체탐구 Exploring Polyhedron' - 카르마(業, Karma कर्म)

  • 다면체탐구 Exploring Polyhedron 는 3D프린터를 이용해 만든 6개의 피사체와 '진짜 달걀' 1개를 피사체로 작업한 7점의 사진으로 구성된 연작입니다.

  • 작가 웹사이트 작품소개 페이지: https://www.bhangyoungmoon.com/polyhedrons




"카르마 Karma कर्म 는

제사 yajña यज्ञ 를 지내는

사제 brahmin राह्मण 의 행동을 가리키던 말이었다."


오늘날 '카르마'라는 말도 본래의 의미와는 많이 다른 의미로 사용됩니다. 윤회, 아힘사와 같은 말들과 연관이 됩니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에게 도덕적 압력 moral pressure 을 주니까요. 한마디로, 더 바른 생활을 할 수 있게 만드는 동인(動因, a motive)이 되어줍니다.

그렇지만, 말의 변천을 통해 원래 의미를 생각해보고, 그것이 사용되던 맥락을 더 깊게 이해하면,


첫째로, 우리는 더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고,

둘째로, 어떤 상벌의 댓가 없이 더 자유로운 상태에서 도덕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은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카르마 Karma कर्म



제 연작 <다면체탐구>의 마지막 사진으로, 작품의 제목은 '카르마'입니다. 제가 이 카르마라는 말을 제목으로 선택한 맥락은 이 말의 더 오래된 의미와 관계가 있습니다. 이 말은 제사 yajña यज्ञ 를 지내는 사제 brahmin राह्मण 의 행동을 가리키던 말로 나의 행위가 우주를 운행한다는 생각이 그 기반에 있습니다. 야즈냐라고 불리던 제식을 통해 삼라만상의 운행, 특별히 전환 transition 을 일으킨다고 믿었던 사람들의 믿음에서, 그 제식을 집도하는 사제의 행동을 가리키던 말에서 '카르마'라는 말이 왔다고 합니다. 이러한 제식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던 것이 '말'로 이루어진 공물(貢物, tribute, tributary payment)입니다.


제식을 뒷받침하는 지식정보 그리고
그것을 운영하는 '말'의 중요성에 관한 그들의 생각을 고려해볼 때,
카르마(, Karma कर्म)라는 말을 만들어낸 생각과 문화의 바탕에는
언어가 세상을 움직인다는 생각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의 언어가 나의 현실을 짓는다


저의 사진 연작 <다면체탐구 Exploring Polyhedron>는 현실의 인식과 이해의 방향 그리고 그러한 지식의 획득을 통해 세상을 실질적으로 다룰 수 있다는 점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카르마'도 이 단어의 본래 의미에 충실해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원리를 이해하면, 이 세상을 나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생각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나의 언어가 나의 현실을 만든다는 생각과 연결이 됩니다. 그리스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인식론'이라는 이름이 붙은 방식의 관점을 빌려오자면, 카르마를 만든 이러한 인도아리안들의 생각은 이후 나가르주나와 같은 대승불교 사상을 형성하는데에도 중요한 생각의 샘물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이, 나의 언어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그 틀을 벗어나는 사유를 연습하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과 언어를 바라보는 방식에 '메타 meta-'라는 접두어를 두는 것입니다. 메타인지 (meta認知, metacognition) 같은 표현이 적당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의 연작 <다면체탐구 Exploring Polyhedron>가, 우리 인간이 개념화나 추상화, 그러니까 언어와 같은 중간 매개자가 없이 세상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면, 마지막 작품인 '카르마'에 오면 그러한 추상관념들과 연역적 사고가 세상을 쥐고 흔들 수 있는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는 점을 주장하게 됩니다. 이것이 연작 전체의 흐름입니다. 중간 5장인 '플라톤 다면체 Platonic Solids'가 그러한 흐름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사진 작업에 담겨진 나의 '언어와 그 생각의 뿌리에 대한 집착'에 관하여


제가 이런 작업들에 집중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우리 인간이 이제는 덮어놓고 신비적으로 사고하는 방법에서 벗어날 시기가 되었다는 것을 항상 고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프로이트나 융의 주장처럼, 강박관념이나 집단의 심리가 종교나 신을 만들었다고 주장을 하건, 공진화론자들이 주장하듯이 인류가 처한 공통적인 상황들이 불러온 평행진화의 과정이 신이나 종교를 만들었다고 주장하건, 중요한 것은 우리가 덮어놓고 신비적 주장에 빠지는 것은 이제 그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 나름의 아이코노클라즘, 그러니까 성상파괴 운동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바로 그런 미신적인 사고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을 때 도덕적이 될 수 있어야 정말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현재 나의 행동이 내세를 결정한다던가, 죽어서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던가 하는 생각 때문이 아니라 현재 이 시점에서 내가 온전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더 순수한 열망? 댓가성이나 신과의 거래가 아닌 더 순수한 동기가 가치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비슷한 메시지가 있죠. 죽어서 천국에 들어간다는 그런 접근이 아니라 지금 자신이 빛 안에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처럼 말입니다. 상벌을 떠나 더 나은 윤리를 추구하는 것 즉, 밝음을 원하게 되는 것이 곧 상이며, 어둠을 원하게 된다는 것이 곧 벌인 셈입니다. 사후 세계의 상벌이란, 어찌보면 이러한 것들을 이해시키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나온 일종의 연습과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가장 의미가 없기도 합니다.


이러한 생각들을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생각의 틀을 형성하는 것들의 근원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좀 더 자유로워 질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을 통해서 한단계 더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저의 작품 활동의 근간을 이루는 생각입니다.

카르마의 수용사


이들의 언어는 어디에서 왔을까?


'카르마'라는 말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여전히 다양한 주장이 존재하지만 이 단어를 만든 언어는 흑해-카스피해 초원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일명 '쿠르간 가설'이 매우 유력합니다. 마리야 김부타스 Marija Gimbutas 와 같은 학자들을 중심으로 주장된 이 가설은 다양한 연구를 통해 20세기 후반부터 강한 설득력을 얻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연구들은 생태, 환경, 가축, 작물들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사회와 경제 그리고 주변 언어들과의 관련성 등을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오늘날에는 정착 농경이 일반적이라 '작물'이라고 하면 땅을 개간하고, 큰 폭의 경관조성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과거의 '작물'이라고 하면 특정한 지역에서 야생으로 자라나는 작물들을 거둬들이는 과정이 중심이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따라서 농사의 방식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작물이 자라는 환경이었습니다.



인도아리안들의 이주


이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이주를 시작합니다. 이주의 원인은 다양합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기후의 변화가 있습니다. 그들이 살던 초원지대의 날씨가 점점 추워진 것은 물론, 추워지는 날씨에 따라 수면 아래 잠겨있던 땅들이 드러나는 등 커다란 변화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의 이주 경로는 매우 다양했고,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언어는 다양하게 분화했을 것입니다. 켈트어 사용에서 현대미국영어가 발생하는 시기까지를 약 천 년 가량 걸리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쿠르간, 얌나야 문화를 기원전 4천년 경으로 보고 있다면, 베다가 성립하는 기원전 1,500년에는 2,50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며 수많은 언어들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다양한 이주 경로와 언어의 변화들은 수많은 문화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 뿌리가 되는 사고방식이나 언어가 매우 유사한 측면이 많음에 놀라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이주경로들이 문화나 경전 속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현재 시리아 지역 인근에는 '미타니'라는 왕국이 있었습니다. 이 왕국에서 발견되는 기록과 베다에서 전해지는 신들의 이름이 같은 경우가 많이 있다고 합니다. 또한 조로아스터교의 '아후라마즈다 (اهورا مزدا Ahura Mazdā)'와 같은 신의 이름을 자신들의 신과 대적하는 세력로 전승시켰지만, 조로아스터교 만큼이나 '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베다의 관점 등 많은 흔적들이 나타납니다. 후기 이주하는 인도아리안들은 미타니와 오늘날의 이란 지역을 거치면서 제식을 더 정교화 했던게 아닌가 합니다. 야즈냐의 제식, 인도아리안들의 불의 신 ‘아그니’와 조로아스터교가 불을 중시하는 것은 나름의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지 그리고 이들이 이주하며 거쳤던 지역들 중에는 이런 불의 제식을 중시하는 지역들이 많았던 이유도 있습니다.


인도유럽조어 Proto Indo-European language 에서 갈라져 나가는 언어들은 구조적으로 주부와 술부가 명확하게 분리되는 특징을 갖습니다. 우리말과는 매우 다릅니다. 이러한 언어의 구조는 이들 사고방식에 매우 중요한 특징을 부여하게 됩니다. 고대 그리스의 사고방식을 뿌리로 하는 헬레니즘은 이러한 언어의 특징이 갈 수 있는 가장 깊은 곳을 향해 움직였습니다. 같은 어족인 인도 역시 유사합니다. 현대 과학의 관점에서 볼 때, 플라톤(Plato)의 다면체와 우주의 원소는 사실 깊은 관계가 없고, 데모크리토스(Democritus)의 원자론은 훌륭한 통찰을 보여주지만 구체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인도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철학들 또한 우주의 구조에 대한 통찰을 멋지게 보여주지만 구체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없습니다. 붓다(Buddha)의 '연기(緣起)'를 기본으로 하는 불교의 수많은 생각들이 오늘날 현대물리학이 그려내는 우주와 유사함에 놀라움을 느낄 때도 있지만 구체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때문에 인도 철학이나 그리스 철학 모두 인간의 사고가 도달할 수 있는 깊은 통찰의 세계를 엿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음에는 의심할 바 없다는 점을 알 수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은 과학과 수학의 뿌리로 오늘날에도 자주 논의되지만, 인도의 철학이나 앞서 언급한 '야즈냐', '카르마' 같은 것들은 다소 종교적이거나 미신적인 것으로 취급 당하기도 합니다. 유럽 중심의 그레꼬-로만 문화가 가진 일종의 우월주의적 사고방식입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도 베다시대의 카르마도 모두 통찰력은 보여주지만 사실상 '말도 안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한쪽은 철학의 뿌리로, 한쪽은 미신적인 것으로 취급이 되는 것은 불합리한 오늘날의 통념을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저는 기본적으로 '초월적'인 것들과 '신비적'인 것들에 대한 모든 관심이야 말로 모든 미신과 불합리한 믿음의 근간이라고 생각됩니다. 재미있게도 인간의 지능과 기억력 그리고 긴 시간을 고려할 수 있는 발달된 두뇌로 인하여 신을 비롯한 다양한 믿음이 생겨나기도 하였지만, 이러한 부분은 다른 작업을 통해 다루려고 합니다.


카스피해 인근 암석지대 - 과거 바닷속에 있었던 지역 © 방영문, 2017



채집수렵에서 정착생활로의 변화는 '신'과 '지배논리'를 탄생시킨다


인류의 정착과 농경생활이 시작된 시점과 소위 말하는 선사시대 신비로운 유적들이 만들어진 시기는 거의 비슷합니다. 괴베클리테페(1만 1,500년전), 할란 체미(1만 2,000년전) 같은 잘 알려진 유적들은 이러한 시대의 초창기에 해당할 것입니다. 동물의 가축화와 함께 생겨난 족장중심 문화들은 사유재산의 문제들에서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동물의 가축화와 함께 남성중심의 가족제도가 강하게 두각을 나타냅니다. 사유재산이라는 관념이 형성되면서 가축은 쉽게 빼앗을 수 있고 눈에 보이는 재산입니다. 개는 인간과 식량을 공유하면서, 말은 발굽을 통해 스스로 먹을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동물로 카스피해 인근 지역들에서 매우 일찍부터 길들였지만, 그 외의 가축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소와 양은 상당히 뒤늦게 인간 사회에 들어온 동물들입니다.


소와 양은 손이 많이 가는 가축입니다. 개와 말을 길들인 이후에야 의미있는 가축의 규모와 그 관리에 대한 관행들이 생겨났을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두 가축은 상당히 많은 지역에서 식용을 비롯해 다양한 목적을 위해 길러지는데 오늘날 기후변화의 상당히 큰 주범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과거 고대사회에서의 목축 규모라면 모르겠지만 오늘날 70억 가량의 인간이 살고 있는 상황에서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소를 길들였던 지역들에서도 소를 식용으로 이용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매우 자주 발견됩니다. 유적에서 발굴되는 유골들을 통해 소를 길렀던 지역들도 대부분은 생선을 통해 육식을 했다는 점이 밝혀집니다. 이러한 점을 통해 엿볼 수 있는 사실은 '소'는 먹기 위해 길렀다기 보다는 상징적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힘의 상징, 제식을 위한 짐승 등이었을 것입니다. 훗날 정착 농경 지역이 많아지면 밭을 갈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가치가 있는 자산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남성중심의 사회를 탄생시키는 큰 이유 중 하나라는 주장은 상당히 신빙성이 있습니다. 지구상에 인구가 적어 아주 넓은 분포로 퍼져 있는 사회, 이주가 잦고 야생식물을 채집하던 사회에서는 각기 다른 인간 공동체가 충돌할 일은 크지 않았습니다. 우바이드기 메소포타미아 남부에서도 '도시'라는 개념은 미약했습니다. 인도유럽어에서도 오래될수록 '도시'를 의미하는 단어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사회가 거대해지면서 '도시'나 '국가'와 같은 생각이 뿌리를 내리기에 훨씬 앞서 사람들을 하나로 묶은 것은 가족과 신앙입니다. 조상에 대한 기억을 전달하는 과정이 훗날 '신'을 만든 과정이었다는 가설은 매우 설득력이 강합니다.



농경과 정착사회 그리고 신들의 탄생


정착 생활이 시작되면 조상들 중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인물들은 자주 화자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들 중 일부가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오늘날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존재로 여겨지기 시작했다는 것은 매우 유력한 가설입니다. 집단이 커지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지고신, 절대신, 하늘신과 같은 강력하고 전능한 신의 존재가 그려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절대자, 하늘신 같은 존재는 고대 도시의 탄생과 그 시기가 맞물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렵지 않게 이러한 신화적 세계관이 정치와 지배논리였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조상과 나의 혈연관계를 주장한다는 것은 원래 토지의 소유권 주장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과거 이주생활을 할 때는 이런게 그렇게 중요하진 않았습니다. 죽음에 대한 관념이 생기고 부장품을 매장하는 것도 가능했지만, 이주 생활에서는 그냥 영혼만 저승으로 보내준다고 생각해도 문제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게 정착생활을 하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식물의 작물화와 경관조성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지배조직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강력한 신과 기능적으로 나뉘는 ‘신들’이 등장하는 것도 이러한 시기와 맞물린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초반 모세오경에서도 지파별로 인구조사와 땅에 대한 기록을 세부적으로 하고 있는 것을 찾아보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국가와 제도가 세부적인 부분을 다 관여할 수 없었던 시대의 가장 강력한 당위성은 자신의 출신성분과 조상에 관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신분의 격차, 인간 모두가 평등하다는 사고방식은 정보의 공유와 함께 가능해진 것들입니다. 기록과 보존 그리고 공유를 위한 통신 수단은 그만큼 인간의 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들입니다.


조상이 묻힌 땅을 자신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토지 소유권 주장과 신화 만들기의 기본이었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진한 신화적 채색이 입혀집니다. 고대 국가들의 왕족이나 영웅들에 대한 신화들이 특히 그러합니다. 또한 많은 이야기들이 특정한 지역들에 퍼져 있었을 것입니다. 수용이나 영향 그리고 재해석의 사례는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사르곤 대왕 탄생기와 모세의 탄생기, 노아의 홍수와 지우수드라, 우트나피쉬팀 이야기는 거의 같습니다. 이러한 고대의 이야기들은 원본을 특정하기 어렵습니다. 대부분은 발현된 지역 정도만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세부적인 사항들이 더해지고, 그 시대에 맞게 조금씩 변해갑니다. 그리고 그런 전승들로부터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들에 소위 말하는 방점을 찍습니다. <길가메시> 이야기를 구성하는 토판들도 '길가메시'의 친구 '엔키두'에 대한 묘사가 조금씩 다르다는 점이 언급됩니다. 농경과 정착이 안정된 시점이 되면 '엔키두'의 야만성이 부각되는 기술들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절대군주가 존재했지만 실질적인 지배력은 강하지 않았던 고대 사회에서는 지고신은 불가침 영역 같은 것이었습니다. 존재는 하지만 그다지 마주칠 일이 없습니다. '바알'의 경우 '아누'의 계보를 잇는 신이지만 '아누'는 정치적으로 크게 부각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수메르의 하늘신 '안'은 더더욱 언급이 적습니다. 이는 각 사회들의 정치제도가 변화한 모습과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집니다. 인도의 경우에도 마우리아 제국과 무굴 제국 시대를 제외하면 수많은 지역 제후들이 다스리던 지역입니다. 1,600개 이상의 언어와 20개 이상의 언어를 헌법에서 국가 공식 언어로 지정하고 있다는 현실이 이러한 상황을 잘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만큼 '많은 신들'이 존재합니다.

결국 정치는 종교인 셈입니다.

이렇게, 정치의 발전과 종교는 같이 옵니다. 오늘날에도 그 대상이 신에서 어떤 추상관념으로 바뀌었을 뿐이지, 정치는 여전히 종교입니다. 이런 신화적 덧칠을 벗겨내는 아이코노클라즘 iconoclasm 그리고 더 자유로운 생각이 가능한 우리가 되어가자는 의미. 이것이 제가 이런 사진 연작을 만드는 이유입니다.


카르마라는 말을 만든 인도아리안들도 비슷한 과정을 경험한 것 같습니다. 브라흐만과 같은 말도 처음에는 언어의 현현 같은 것을 의미했습니다. 말하자면, ‘브라흐만’의 원래 의미라는게 재즈의 임프로비제이션 혹은 그 과정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영적이고 추상적으로 표현되는 이들 언어 표현들은 대개가 아주 tangible 하고, 즉물적으로 사용되던 언어들입니다. 차크라는 전차의 바퀴를 부르는 말이었고, 카르마는 제식을 하는 사제들의 행동을 가리키던 말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더욱 그러합니다.



오늘날에도 그 대상이 신에서 추상관념, 정치이념으로 옮겨 갔을 뿐,

정치는 여전히 종교이며, 신화이고, 미신적이다.



카스피해 서남부 고부스탄 유적의 암각화 © 방영문, 2017

아이코노클라즘 Iconoclasm


오래된 언어들의 단순한 표현들과 즉물적인 단어들이 일부는 신비화되고, 일부는 도덕적 압력 moral pressure 으로 작용해 사람들에 대한 지배논리가 되기 시작합니다. 철기 시대가 되면서 추상관념이 발달하고, 그러한 전반적인 경향이 단순하거나 좀 더 소박했던 의미에 다양한 덧칠을 입히기 시작합니다. 다양한 사상들이 발달을 합니다. 이들 중 하나는 인도 북동부 지역에서 만들어지며 히말라야를 넘고 우리 한반도까지 들어옵니다. 불교의 이야기입니다.

이런 식으로 본래의 의미를 변형하여 후대에서 사용한 윤회, 아힘사, 카르마는 자세히보면 사회에 필요한 도덕관념과 연결됩니다. 그리고 그 뿌리를 자세히 보면 유목민들의 사고방식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습니다. '불살생'이란 자신의 양심에 맡겨 행동하면 되는 것입니다. 아힘사의 논리적 맹점은 바로 유목민들의 보복논리를 우주적 질서로 만들고자 했다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윤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사후에 벌을 받는 것에 대한 기억을 억지로 만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카르마 또한 확대해석의 오류가 되는 것입니다.

불교가 윤회를 받아들이는 것만큼 자기모순에 빠지는 접근은 없을 것입니다. 제법무아(諸法無我)와 윤회의 주체가 양립한다는 것은 '무아는 무아' 즉, '무아라 하는 것은 무아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사실로 존재한다기 보다는 윤리적 기준으로 받아들이면 될 것들입니다. 이것을 사실로 만들고자 시도하는 순간 끝나지 않는 모순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공(空, emptiness)을 이야기 할 수 있지만 공(空, emptiness)에 빠지면 공(空, emptiness)을 논하지 않는 사람보다 치유하기 힘든 병이 든다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정치이념이 그렇듯이 논리적으로 따지기 시작하면 헛점투성이가 됩니다. 개념의 도덕적 활용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살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에 우주적 질서라는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이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많은 모순들과 맞딱드리게 됩니다. 왜 많은 종교들이 낮은 삶을 사는 소박한 사람들이 깨우침을 주는 예화를 많이 가지고 있을까요? 이런 점들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추상관념들, 연역적 사고, 언어의 정교화 등은 우리 인류문명을 만들어 온 아주 중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누구라도 이런 것들을 독점하고, 그것을 이용해 타인을 지배하고자 했을 때에는 여지없이 부작용이 있었고, 그 논리적 구조 안에 많은 모순이 들어있어요.

앎을 통해 신비화의 덧칠을 벗겨내 본래의 청정한 색을 찾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해 어떤 압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것.

제가 이런 작품들을 만들고 있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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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연작 <다면체탐구 Exploring Polyhedron>코카서스 북부에서 인도유럽조어 Proto-Indo European Language 가 발달했다는 가설을 중심으로 베다와 헬레니즘 그리고 중동의 문화들을 통해 현실과 현실인식, 사물의 인과성과 실체 등을 고민하며 구성한 작품입니다. 특별히 연작의 마지막 사진인 '카르마(業, Karma कर्म)'는 앎을 통한 현실지배력과 자유로움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작품입니다. 이를 위하여 언어들의 신화적, 종교적 배경사를 따져보았습니다.


20세기 초, 루돌프 불트만 Rudolf Karl Bultmann 의 탈신화 Entmythologisierung 를 중심으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당대 언어와 현재의 언어의 간극을 이해하고 현재 상황에 맞는 반응체계를 이끌어내고자 했던 노력에 그 뿌리가 있을 것입니다. 2019년 7월 이화여자대학교 ELIS STC 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다면체탐구 Exploring Polyhedron'라는 7점의 사진연작을 공개하였습니다. 3D 프린팅과 디지털 사진이라는 작업 과정이 프로그램과의 접점이었는데, 저는 인과성, 현실인식 등과 같은 것들에 대한 고민을 다루며, '인간과 현실'이라는 주제 또한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작업입니다.



카르마(業, Karma कर्म)의 수용사에 관한 다른 아티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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