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hang, Youngmoon

2022 인천개항장 국제사진영상페스티벌 온라인 도슨트 - Lives



Conspectus

지독히도 제한적이겠지만, 우리가 상정해 볼 수 있는 '현대세계 The Modern World'는 그레꼬로만 문명이 추구했던 세계를 간결하게 기술(description)하는 것을 통해 '진리'라 불리울 만한 사고체계를 축조하려는 철학과 과학의 세계, 인간의 실존적 문제를 고민했던 종교, 그레꼬로만적 사고축조의 노력과는 별개로 현상적 세계 속에서 진리를 찾고자 했던 동아시아 사람들의 학문 세계 그리고 이것들과 다소 모호한 경계를 이루며 미적 가치를 바탕으로 구현되는 예술의 세계가 일궈낸 기술문명을 바탕으로 하는 현재완성형적이고 누적적 현상황과 미래를 앞두고 사회가 직면하는 한계성 사이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련의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사진예술을 통해 표현을 하는 입장에 있는 나는 현대세계라는 거대한 틀을 이해하기 위해 '개인'의 입장에 서야 한다.

'현대'를 기술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 있는 것처럼 개인 즉, 한 사람을 기술할 수 있는 전제조건 또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사진연작 <현대세계 The Modern World>는 바로 이러한 세계와 개인의 상호작용 interaction 을 통해 표현되는 사진 연작이다. 이것은 개체의 입장에서 총체 즉, 세계를 바라보려는 시도이다.


<현대세계 The Modern World> 작품 전체 보기


<Lives> 동영상 작품 <Involuntary reaction> 감상하기



2022 08 전시 작품 소개

2018년에 완성한 이 작품은 <Lives>라는 표제를 붙였다. 사람의 눈은 빛을 수용하는 부분이 망막 혈관 뒤에 있다. 우리는 실상 망막을 지나는 수많은 가닥의 모세혈관 그림자로 뒤덮힌 세계를 보아야 하는 것이지만 우리 대부분은 깨끗한 시야를 얻을 수 있다. 눈으로 수용된 정보는 뇌에서 조정되고 그 과정에서 혈관의 그림자는 사라진다. 일상 생활에서 안경착용자가 안경에 대한 의식을 매번 하지 않을 수 있는 것, 분명 시야각 안에 들어오지만 평소 의식되지 않는 우리의 코 또한 비슷하다. 안구의 움직임과 정보를 보정하는 뇌의 협업이 불필요한 정보를 제거해주는 것이다. 반대로 이러한 것들을 역으로 이용하여 우리가 평소 경험하지 못하는 현상을 경험하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이 사진은 이번에 전시하는 작품의 중심에 놓인다.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단순한 빛으로 형상화 한 것이다. '나의 의지대로 세상을 본다는 것은 가능한가?'라는 의문에서 출발하여, 응시하는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눈에 남는 잔상으로 인해 밝은 점들 안에서는 검은 부분이 생겨나고, 강제되는 시선의 움직임으로 인해 어지러운 느낌을 받게 된다. 조금 심해지면 점들이 배열된 직선상의 배열이 휘어진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나의 눈이 나의 의지에 있지 않다는 것을 경험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나의 눈인가?'라는 의문을 조금 더 세분화하면 '나'와 '눈' 그리고 '소유관계' 등을 해체해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서 '나의 눈인가?'라는 질문에 빠져 엉뚱한 길을 선택하기 쉽다. 나와 눈의 관계를 다시 상정하는 가운데 왜 '나'와 '눈' 자체는 해체해보지 않는 것인가?

나는 이러한 세분화 작업과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해체작업의 끝에는 존재론적 제1원인 같은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원리들만이 남는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법계(法界) 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한 불교의 관점과 매우 비슷하기에 불교의 경전과 그 관점을 바탕에 두는 것은 지난 5년 가량 계속되어 오고 있다.


불명확한 경계는 불수의적 반응들을 통해 알려지게 된다


안팎 혹은 자타의 경계는 인식주관자의 개념화를 걷어내면 애초에 분명하지 않다. 나는 이것을 '시각계 visual system'를 통해 계속해서 공유하고자 한다. 대부분의 인간 언어에서 '내가 본다'라는 능동형 문장 혹은 '내게 보인다'라는 수동형 문장의 구분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능동태나 수동태 문장 모두가 '나'라는 존재론적으로 이해되는 어떠한 주체를 '보다'라는 행위를 통해 수식하는 주어로 만든다. 지나치게 세분화하는 언어는 대부분의 경우 정보 혹은 의사전달에 적절하지 못하다.


언어가 인간이라는 무리가 갖는 힘을 극대화 시키기 위해 발전했음을 의심하기는 어렵다. 제스처 조합은 사물과 개념을 분리할 수 있는 능력을 바탕으로 한다. 이것이 집단에서 어떠한 표준을 형성하고 공유되기 위해서는 효율적으로 '제한되어야 할 필요'가 생긴다. 즉, 인간의 언어, 인간의 정보 전달은 기본적으로 집단을 움직이고 타인을 설득하려는 기능과 목적을 처음부터 강하게 포함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개념화는 경계선을 명확하게 긋는 행위를 상당부분 포함하는 행위다. 지향점을 공유하는 공동 지향성과 집단 지향성을 기본으로 하는 인류의 지능은 이렇게 실상으로부터 개념을 뜯어내 단순화한다. 즉, 그때그때 성분비가 조금씩 다르고 상황에 따라 어느 정도의 일관성을 유지할 뿐인 다소 특정한 사태를 가리켜 '나' 혹은 '너' 혹은 '우리'라고 명명하는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이렇게 '있지도 않은' 나, 너, 우리를 찾겠다는 일념하에 인생의 상당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눈 eye 을 하나 보더라도 이것이 '나'라는 주체를 기반으로 발달하는 것이 아니라 태양 복사의 정점(peak)을 감각에 활용하려는 생물의 '반응'이었다는 점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이렇게 보는 것'은 존재론적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라 '우연히도' 거주 가능한 생명체 거주가능영역(circumstellar habitable zone), 소위 '골디락스 존 Goldilocks Zone'에서 가장 손쉽게 쓸 수 있는 우리 항성의 에너지 활용 방법이었다. 말 그대로 장구한 세월 동안 이 영역(zone)에 사는 생명체가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획득한 능력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 자신이 환경의 변형이며, 세부적으로 들어가보면 '나'라고 할 만한 것을 찾을 수 없게 된다. 가분성(可分性)에는 한계가 있고, 우주 제 1원리 같은 것은 잘못 입력된 코드 같은 것이다. 날아가지 않는 화살과 다른 것이 없지 않은가? 나무를 흔들면 열매가 떨어진다는 전/후방 추론에 추상개념이 더해졌을 뿐이다. 사용할 수 없는 측정법을 전혀 다른 분야에서 사용하는 것임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이것이 대부분의 인간에게 받아들이기 참 어려운 것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다보면 다시 한 번 상호작용 interaction 이라는 기본적인 원리를 따라가기보다 존재론적 '개념화' 즉 선을 긋고 경계를 만드는 행위의 유혹에 빠진다. "내가 곧 태양이로구나"와 같은 깨달음이 불현듯 내 마음에서 솟아나는 체험과 감동으로 뜨거워진다. 안그래도 살기 어려운데, 무의미한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려다 보니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과정 전반이 대부분 피곤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경계의 불명확함과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반응들이 '나'로 알려진 '사태'의 얼마나 많은 부분을 구성하는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불명확한 경계와 불수의적 반응 만큼 우리를 당혹스럽고 심지어는 불쾌하게 만드는 경험도 드물다. 우리는 미지를 즐거워하기 보다는 몹시도 불쾌해한다.

불수의적 반응 Involuntary Reaction

나는 <현대세계 The Modern World>의 키워드를 '불수의적 반응 involuntary reaction'으로 잡았다. 이러한 '불수의적 반응'의 유도는 크게 신체적인 감각 반응과 생각과 같은 심적 반응을 유도한다. 사진연작 <현대세계 The Modern World>는 작품의 감상을 통해 개인이 경험하게 되는 불수의적 반응(involuntary reaction)을 유도하고 이것을 기반으로 '사회적 층위'의 현상들을 바라보도록 한다.

초기 불교 시대의 산물이라 할 수 있는 팔리어 경장 5부 중 첫 번째 경전 묶음인 <디가 니까야>에는 '대념처경 Mahāsatipatthāna Sutta'이라는 경전이 있다. '대념처경 Mahāsatipatthāna Sutta'은 붓다의 명상 체계와 구체적인 수행방법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가 왜 호흡에서 시작해 자신의 몸을 구석구석 살피는 방법을 가르쳤는가? 나는 바로 이것 즉, 나의 가장 가까운 여건인 나의 몸을 관조하는 행위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통찰의 세계를 여는 방법을 그가 가르쳤다고 믿는다. 이러한 방법은 고대 인도의 브라흐만 수정주의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있으나, 불교가 그들과 아주 크게 다른 것은 그들이 어떠한 불이론적 일체화, 사후해탈 그리고 우주적 일자로 합일되는 프로세스의 허망함을 따르지 않도록 권고한다는 것이다. 나는 불교의 이러한 생각을 매우 합리적이라 생각한다.

나는 2021년 개인전에서도 <응시>라는 연작을 통해 우리 자신의 불수의적 반응을 이끌어내는 시도를 했다. 동일한 노출 exposure 두 장이 배치에 따라 완전히 다른 밝기로 보이도록 의도한 두 점의 작품이 그것이다. '본다는 행위'의 확실성에 대한 의구심을 던지는 것은 물론, 나의 보는 행위가 오류에 빠져있음을 알면서도 문제를 교정할 수 없음을 경험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감관'과 나의 관계를 재조명한다.


나의 눈, 나의 시선이라 하지만 그것이 나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눈은 누구의 눈이며, 이렇게 만들어지는 시선은 누구의 시선인가?

이 작품은 이러한 문제 의식에서 출발한다. 내가 나의 '감관'을 나의 것으로 생각할 때 세상은 그렇게 한정되어 그렇게 해석된다. 그러나 내가 처한 상호반응, 상호작용의 상황을 통찰할 수 있다면 훨씬 더 자유롭고 폭넓은 세계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개체 즉, 우리 자신은 다양한 한정성과 한계상황을 통해 정의된다. 나의 몸이 나의 의지대로 자라나지 않는 것이며, 나의 생각이 나의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것은 우리가 너무나 쉽게 경험할 수 있는 실존적 한계 상황들을 잘 말해준다. 그러나 이토록 가까이에서 우리 자신에 대한 깊은 통찰의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평소 이러한 상황들을 통해 어떠한 통찰을 얻고자 시도하지 않는다.

이처럼 나의 감각과 나의 생각도 나의 통제하에 있는 나의 소유물이 아니라 내가 추스르고 또한 관계 맺어나가야 하는 것들이다. 아니, 더 정확히는 존재론적 주체로 생각되는 ‘나’ 또한 네트워크적으로 나타나는 일련의 현상인 것이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우리의 실존적 한계는 가장 명확하게 우리 자신을 정의해준다.

또한 그러한 개개인들이 모여 이룬 집단이 직면하는 시대적 한계성이 곧 현대성을 정의한다.

개체의 입장을 취해 총체 즉, 세계를 바라본다

나는 이 작업을 위해 '개인에 의한 통찰'이라는 시점(perspective)을 취한다. '나' 내지는 '개인'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어떠한 대상은 존재론적 기술 ontological description 을 통해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안팎 혹은 자타의 구분이 없이 상호작용하는 다양한 사건들이 어떠한 일관성을 획득하여 그 현상을 보존하고자 하는 의지적 형태를 띄는 일련의 현상으로 기술될 수 있을 것이다. 자주 '주체 subject'로 표현되어지는 한정된 '사태'는 상당히 구체적으로 특정될 수 있는 일관성을 띈다. 이러한 일관성을 담보해주는 것은 보다 분명하게 물리적으로 경험될 수 있는 육체적 상태와 감각기관과 그것을 누적할 수 있는 기억에 의해 그것을 지탱하게 된다. 따라서 개인에 의한 통찰이라는 시점을 취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감각기관을 통해 개인이 누적하고 있는 정보가 반응하도록 시도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또한 나의 작업은 '사진'이라는 산업화 시대, 기술문명의 산물인 동시에 '시각예술'이라는 분야로 한정할 수 있는 측면이 강하기에 이러한 감각기관을 통해 누적된 정보와 상호작용하는 방법은 '시각 visual sensation'에 한정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나와 같은 분야에 몸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고민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러한 고민에 대한 각자의 해답들이 각자의 작품을 이루어간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번에도 감각기관에 매우 직접적인 호소를 선택했다.

개인의 감각기관은 생각보다 감각기관의 소유자라 생각되는 개인의 의지 하에 있는 경우가 별로 없다. '시각'에 한정한다면 대표적인 현상은 '착시'가 있을 것이다. 또한 상황에 따라 균형을 유지하거나 밝기에 대한 감각이 무너지면 시각을 통한 상황 인지를 제대로 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생각들을 토대로 이번 작품들을 구성해보았다. 감관(感官 sense organ)의 공(空, emptiness)함을 논하는 관점은 주로 불교의 관점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옥스포드의 불교학자 알렉산더 윈(Alexander Wynn) 박사는 그의 연구를 통해 불교가 당대 불이론적 명상상태 즉, 주체와 객체가 해체되고 사후 해탈을 통해 성취될 불이론적 원천인 브라흐만과의 합일이라는 주장의 문제를 지적하는 동시에, 어떠한 명상상태의 성취는 통찰을 위한 체험적 토대로 다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했음을 설명한다.



Lives © BHANG Youngmoon, 2018




2022/11/22, 
인천 아트플랫폼에서

뮤직그룹 세움 Music Group SE:UM 의 음악과
이민정 작가의 손길로 
저의 사진 작품이
미디어 아트 공연 작품으로 재탄생합니다.

뮤직그룹 세움 유튜브 채널: https://www.youtube.com/channel/UCLW9Lsy5MP6S3h9ZYcfZbBQ/vide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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