凝視, 空의 感覺
Contemplative Contemplation - the sense of suññata
<순야타 suññatā, 空>
배타성(排他性, exclusivity) 그리고 개체성(個體性, individuality)
우리가 본질(本質)이나 근원(根源)을 이야기의 주제로 꺼내면 왜 어떠한 결론을 향해가기보다 어떤 언어의 구조물을 축조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왜 그럴까? 우리가 '깊다'고 생각하기 쉬운 이런 개념적 논의들의 밑바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바로 '배타성 排他性, exclusivity'을 바탕에 두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각자의 개체성과는 조금 다릅니다. 배타성을 바탕에 두는 생각들은 어떠한 순수성을 추구하게 되고, 일면 그것은 아름답게도 보이지만 사실은 끝나지 않은 논의와 개념과 논박의 철옹성을 축조하며 점차 변해갑니다.
왜 우리는 이러한 '관념의 모험'을 시작하면 사실상의 모순구조를 벗어나기 어려울까요?
물리적 표현 도구와 관념의 격리 그리고 이 지구상에서 먼 옛날 우리 인류의 언어가 나타나기 시작할 무렵 그 시점을 통해 우리는 언어의 구문적 제약, 한계성들이 바로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우리 인류의 신경구조적 한계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 참 많은 것들에 대한 대답을 얻게 됩니다.
집단이 가진 어떠한 지향점을 목표로 설정하고 소통 체계를 점차 정교화한 것은 결국 한 생물 종(種, species)의 생존전략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관념의 모험'은 우리를 다음 단계의 문앞까지는 가도록 해주지만 문을 여는 방법은 지금까지와 매우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순환 circulation 은 원 circle 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
본질과 근원이 관념적인 것들이며, 더군다나 그것들은 '격리' 혹은 '분리'라는 우리 언어가 가진 가장 기본적인 특성으로 인해 배타적입니다. 순환은 원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으며, 변화는 직선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바다가 생물의 태(胎, womb) 역할을 했던 것은 부정할 수 없겠지만, 오늘 우리가 바라보는 바다의 모습은 시아노박테리아의 광합성 진화에서 비롯되는 원생이언 초기의 산소 증가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大聖說空法 爲離諸見故 若復見有空 諸佛所不化
“공성(空性)은 모든 견해를 제거하는 수단이라고 했다.
그러나 공성을 견해로 갖는 자는 구제받기 어렵다고도 했다.”
- Nāgārjuna(नागार्जुनः, 龍樹)
'공(空)의 감각'적 소통을 하기 전에는 반드시 버려야 할 것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주체(主體)를 상정하는 생각입니다. 언어의 발달사를 보아도, 인간 언어의 구문론적 특징을 보아도 이것은 매우 어려운 '감각하기'입니다. 처음부터 우리 인류의 언어는 주부와 술부를 격리하는 구조를 바탕으로 이 세상에 등장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아마도 진화된 뇌 구조에 의해 부과된 구문론적 제약들은 전지구적으로 globally 최적의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언어가 최초로 진화되었을 시점에, 지구상 포유류 뇌의 신경 구조가 주어진 상태에서는 지구의 언어들이 그러한 구조적 형태를 지닌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Daniel C. Dennett)
우리가 생존과 번영의 목적을 토대로 목적 지향적 소통을 효율화하고 광범위화 하는데 성공한 것은 틀림 없으나 그 바탕은 언어가 시작될 무렵 지구상 포유류가 가진 신경구조라는 한계 상황과 더불어 시작되었다는 점 또한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언어적으로 지시할 때, 곧 관념적으로 떠올리고, 개념적으로 경계를 만들 때에는 반드시 이러한 '신경 연결성의 한계성'을 바탕으로 전체 그림을 볼 필요가 생깁니다. 이것은 생물이 가진 생존 기능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또 다시 두 가지 정도의 생각을 조정할 필요가 생깁니다.
하나는 우리 내면에 어떠한 깊이가 있고, 그것을 이루는 혹은 그것의 씨앗이 되는 혹은 고대 인도-아리안들의 생각처럼 존재와 감각의 저변에는 아(我, ātman)가 있다는 느낌입니다. 이것은 대표적인 '분리의 감각'에서 비롯된 관점입니다. 세상과 우리가 분리되어 있다는 감각은 하나인 우주를 추구해야 할 당위성을 (거꾸로)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 개체성, 물질은 모두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고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이렇듯 다른 하나는 개체성의 부정입니다. 언어의 격리, 분리, 배타적 특징으로 인해 우리는 경험되는 개체성을 부정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합니다. 우주와의 합일, 자연과의 교감, 파동/바이브 같은 상상을 동원하며 동화적 상상에 심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주가 뜻이 있고, 자연이 어머니 같으며, 다른 개체와 내가 내적 소통이 가능하다는 느낌은 바로 '당신이 인간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상상입니다. 바로 인류라는 생물종(種, species)의 특징을 외부세계에 과도하게 투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위 '영적'이라고 믿어온 생각이 결국 인류의 신경연결성 특징에서 발현된 초기 언어적 특징과 관계가 있다는 즉, 우리의 생물학적 특징으로 인해 발현되는 일종의 '환각'임을 조심스럽게 붙잡고 한 걸음을 내딛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있다'고 한정하는 것도,
우리가 무엇을 '없다'고 외면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우리의 생물학적 특징들입니다.
나를 객관화하기 위해서 '바라보는 자'의 자리에 서면 언뜻 무엇인가를 초월한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하지만 정작 그것이 정말 '나의 문제'가 되었을 때는 이전과 다를 바 없는 스트레스 반응을 일으키며 더 큰 자괴감이 빠지기 쉽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마치 타인의 문제인 것처럼 다루기 시작하면 부조화를 경험하게 되고 인격동일성에 위험이 가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소위 '위선적'이라고 느끼는 모습이 바로 이러한 것들입니다.
우리 자신의 모습을 '메타인지적'으로 바라보는 동시에 '감각하는 것'을 저는 "공(空)의 감각(感覺)"이라고 부릅니다. 즉, 상대화하여 나와 분리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식하지 못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도 아닌 감각입니다.
이번 저의 작업은 바로 그러한 고민과 연습을 보시는 분들과 공유하는 장(場)입니다.
여정이 시작될 때,
첫 걸음을 내딛지 않았다면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첫 걸음을 내딛는 순간 '시작'은 사라집니다.
'시작'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것은 사건의 전환이 일어나는 경계선이지만
그어져 있지 않은 경계선입니다.
사건의 전환 그 자체가 경계선이 작동했음을 말해줍니다.
결국 '존재론적 유무(有無)'와 같은 철학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우리에게 그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 인지, 인식 그리고 앎의 한계를 가만히 응시하며 살피는 여정을 시작해봅니다.
철학, 근원, 본질, 순수성, 구분 같은 것들은 한 번 버려봅니다.
이것은 여정을 시작하는 매우 중요한 생각입니다.
시작과 끝, 常/無常으로 구분하지 않으며
일어나는 그대로 바라본다는 의미에서
저는 이것을 '공(空, suññatā)의 감각(感覺)'이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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