凝視, 空의 感覺
Contemplative Contemplation - the sense of suññata
<凝視 Contemplative Contemplation #1>
<凝視 Contemplative Contemplation #2>
2020, Inkjet print, 150 x 100 cm
옥스포드의 불교학자 리처드 곰브리치(Richard Gombrich)는 처음의 불교 즉, 붓다가 가졌던 문제의식의 바탕은 "붓다가 본질주의자가 아니었으며, 브라민들과는 대조되게도, 그것이 '무엇이었는가'보다 '어떻게 작용하였는가'에 더욱 관심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우파니샤드>와 같은 고대 인도철학에서는 소우주와 대우주를 유일한 본질로 환원시켜 1=1의 균등화를 이야기합니다. 반면 붓다는 양쪽 모두에서 본질의 존재를 부정하며 평행한 균등화(0=0)를 이야기합니다.
역시 옥스포드 출신의 불교학자 스티븐 콜린스(Steven Collins)는 붓다의 법(法, dhammā)은 "실행되어야 할 규범적 체계이자 직관적 명상에서 경험의 대상인 요소"라고 정리합니다. 이것은 자신과 다른 사람의 신체적 변화를 관찰하는 것, '느낌(受)'에 대한 지각에 관한 것, 마음 상태의 지각에 관한 것 그리고 그러한 앎을 토대로 법들(dhammā)을 지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명상자는 가르침에 대해 생각하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가르침으로 생각하는 행위자의 입장으로 옮겨갑니다. 불교적 관점이란 '열린 결말적 관점'이며 이것은 '무엇'을 논하는 본질주의적 관점이 아니라 '어떻게'알고 '어떻게' 경험하는가를 묻고 이에 답하는 것입니다. 붓다와 브라민들 혹은 당대 사문들의 가장 큰 차이는 그가 인식론과 존재론을 혼동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불교의 관점에서 설득력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무엇'에 관해 묻고 결론을 도출하기 원하지만 이러한 경향을 소급해 들어가다보면 먼 옛날 호미닌의 신경연결성에서 발현된 사고와 언어의 특징을 발견하게 되고, 그것은 결국 우리가 사는 이 세계의 실상을 반영한다기 보다는 한 생물종(種, species)의 입장에서 생존확률을 높이기 위한 수단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우주의 시작과 끝을 묻는다는 것은 우리가 심오하며, 철학적이고, 영적인 존재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먹을 것을 찾아 산기슭을 헤매는 포유류 집단이라는 증거에 가깝다는 사실을 우선 알아야 합니다. 물리적 세계에서 신체적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다 시도하기 전 다양한 시뮬레이션을 시도하는 일종의 사고실험은 원인 - 결과라는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보시는 이 두 점의 작품은 바로 이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던 작업입니다.
다르게 보이는 같은 색
두 작품은 완전히 동일한 두 장의 노출(exposure: 사진 작업의 중간 결과를 표현할 때 종종 쓰이는 용어)을 조금 다르게 배치하여 완성한 작업입니다. 그러니 색이 동일하게 보여야 합니다. 두 점을 동시에 바라보는 이상 두 점의 색이 동일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안에 위치한 작은 이미지들을 배경에서 분리하면 두 노출이 동일하다는 것은 금방 확인됩니다.
우리는 왜 이런 현상을 경험할까요?
그것은 우리가 자연상태에서 상황의 관측을 통해 경험한 일종의 생존 메커니즘 때문입니다. 주변의 밝기 즉, 광량(光量, light intensity_brightness/luminance)에 따라 그 안에 있는 사물 혹은 다른 생물(포식자 혹은 먹이)을 효과적으로 관찰하기 위해 우리의 뇌가 시지각을 해석하는 방법 때문입니다. 인류의 대부분이 이러한 환경을 벗어난지 오래되었습니다만, 우리는 여전히 밤에 잘 때 시각적 경험을 중심으로 하는 꿈을 꾸고 보색에 의한 착시를 경험합니다.
우리 자신을 조금 더 잘 알아가는 방법은
'무엇' 혹은 '누구'와 같은 존재론적 질문이 아니라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의 방법이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하는 질문에 더 적절한 대답을 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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