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hang, Youngmoon

온라인 도슨트 #4 - 지평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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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지평선을 사진에 담아 이 수평의 선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관점(觀點, perspective) 그리고 우리의 실존적 한계상황입니다.


단순히 계산해보면 우리 지구상에서 성인의 시선이 닿는 지평선까지의 거리는 대략 4.6km 정도 됩니다. 관찰자의 눈높이와 관계가 있기 때문에 개인차가 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공기의 밀도가 빛을 굴절시키기 때문에 원래 지구가 가진 곡률로 만들어지는 가시거리보다 더 멀리 볼 수 있는게 일반적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5km 내외입니다.


우리가 엄청나게 빨리 달릴 수 있는 탈 것을 타고 달려 나가도 이 5km 의 거리는 결코 줄어들지 않습니다. 지평선은 항상 같은 거리 만큼 멀어집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방법이 남습니다. 바로 초속 11.2km 이상의 속도로 달리는 것인데요, 이 속도를 지구 탈출 속도라고 부릅니다. 이 속도로 달리게 되면 지구를 벗어날 수 있다는 의미죠. 지구에서 로켓을 쏠 때 1분 동안 가속해서 이 속도를 만든다고 합니다. 음속의 33배 정도 되는 속도입니다.


1903년, 라이트 형제(Wilbur & Orville Wright)는 인류 최초의 동력 비행(powered flight)에 성공합니다. 라이트 형제의 성공은 날개의 크기와 양력의 관계를 보여주는 상수 constant 즉, 스미턴 계수의 문제를 찾아내면서 가능해집니다. 이 발견 이후 2년 이상의 시도를 통해 그들은 비행을 성공시킵니다. 그리고 66년 뒤인 1969년에는 인류가 달착륙에 성공하게 됩니다.


동력비행이나 로켓의 가속으로도 지평선에 닿을 수 없다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닿을 수 없는 이유는 명확하게 알 수 있게 됩니다. 지구가 둥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로켓 기술을 통해 우주로 나가면 그 문제를 더 정확히 관찰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한계 상황을 깨닫는 것, 지평선에 닿을 수 없다는 현실이 공간의 문제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이해할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의 경이로움이 오히려 우리에게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제가 아주 좋아하는 마크 로스코 Mark Rothko 나 일본의 사진가 히로시 스기모토 Hiroshi Sugimoto 같은 분들도 이런 수평선을 작품 속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 또한 그분들의 시각적 표현에서 영향을 받은 것인데요, 그분들은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을까요? 시간의 영원적 회귀성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저는 저 멀리 보이는 지평선이 아름답다는 기본적인 생각과 더불어서

그 지평선을 사진에 담아 이 수평의 선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관점(觀點, perspective) 그리고 우리의 실존적 한계상황입니다.



Is the world eternal? It only this true and the opposite false?

Poṭṭhapāda, I have not declared that the world is eternal and that the opposite view is false.


Well, Lord, is the world not eternal?

I have not declared that the world is not eternal ...


Well, Lord, is the world infinite, ... not infinite? ...

I have not declared that the world is not infinite and that the opposite view is false.


이 세계는 영원합니까? 이것이 진리이고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은 잘못되었습니까?

폿따빠다여, 나는 이 세계는 영원하다고도,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을 잘못이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스승이시여, 이 세계는 영원하지 않습니까?

나는 이 세계가 영원하지 않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스승이시여, 이 세계는 무한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이 세계가 무한하지 않다고도 말하지 않으며,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을 잘못이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 디가 니까야(The Dīgha Nikāya, Poṭṭhapāda-sutta 中)



작가노트

  • 과학 철학과 사진 철학을 하나로 엮어보자.

  • '빌렘 플루서'는 그의 저서 <사진의 철학을 위하여>에서 "인간은 세계로부터 소외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내가 작품을 통해 일관되게 제시하고 있는 구체와 추상의 분리, 현상과 실재의 분리, 나타남과 본질의 분리의 제시와 구상에도 매우 큰 영향을 주었던 관점이다.

  • 언어적 인식을 가진 인간에게 있어서 세상을 본다 혹은 감각기관을 통해 수용한다는 과정은 일종의 가설을 수립하는 과정이다.

  • 고대인들이 하늘을 보고 별을 따라 선을 그으며 서사를 노래했을 때도, 오늘의 우리가 하늘을 바라보며 천체에 관한 관측 사실을 이야기 할 때도 그것은 그 나름의 이론적 틀을 수반한다.

  • '물이 끓는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는 그 물이 섭씨 100도가 넘었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길을 가다 바닥에 얼음이 언 날이라면 기온이 0도 아래로 떨어졌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이것은 단순히 관찰이 아니라 우리가 물의 끓는점과 어는점에 대한 이론적 이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장하석).

  • 때문에 우리가 본다는 것은 더 이상 단순히 본다는 행위만의 문제가 될 수 없다.

  • 그렇다면 언어적 인식을 배제하고 본다고 해서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는가? - 아니다

  • 언어적 인식의 토대가 거의 없는, 혹은 인간 만큼 선명하지 않은 다른 생물들의 경우 위협에 직면하면 인간보다 훨씬 공격적으로 변한다. 순수한 호의로 내민 손을 무는 짐승의 이야기는 인간들에게 오히려 상식이다. 때문에 인간은 길들여지지 않은 동물을 대할 때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을 역으로 훨씬 더 잘 알고 있다.

  • 위협이 아닌 호의에 관해서도 공격과 구분하지 못하는 짐승들의 행동은 언어적 인식의 배제가 곧 이해의 성취가 될 수 없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다.

  •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언어적 인식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적 인식을 보완하는 일이어야 한다.

  • "모든 것은 마음에 달린 것"이라는 생각은 지나치게 단순화한 생각이다.

  • 사실, 현실이란 마음에 달렸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단순화된 생각이라 오히려 위험이 따른다.

  • 이러한 생각은 다시 몸과 마음의 불연속적 이분법이라는 사고방식으로 떨어진다.

  • 사실이란 인식되는 것, 현실이란 이해되는 것이다. 단순하게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다" 혹은 "마음 먹기에 달렸다"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로 오류에 빠질 수 있는 접근 방법이다.

  • 지평선을 극복해보자!

  • 지평선에 닿을 수 없다는 한계 상황은 공간의 문제이기 때문에 해결되지 않는다: 공간을 구부리는 기술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 이것을 조금 다르게 풀어보자.

  • 지평선에 가서 닿을 수 없다는 사실은 공간의 문제다. 공간을 구부린다면 지평선이 내 손에 닿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지평선이 아니라 행성의 곡률과 빛의 굴절을 통해 가서 닿은 거리에 대한 극복이다. 휘어진 공간에서 지평선은 사라졌다(없다).

  • 지평선이라는 것은 곡률이라는 조건 속에서 나와 대상의 거리를 통해 결정된다. 오히려 바닥에 낮게 엎드린다면 지평선은 손에 닿는 거리까지 가까이 온다. 나에게 지평선 극복의 묘안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이러한 한계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 후에 바닥에 낮게 엎드려 앞으로 손을 뻗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 같다.

  • 후대 불교의 관점처럼 이야기하자면 지평선은 없다. 조금 더 제대로 이야기하자면 지평선은 내가 행성 위에 서서 먼 곳을 바라볼 때 생긴다. 내가 볼 때 지평선이 생긴다. 행성의 곡률에 의해 지평선이 생긴다.

  • 자꾸만 無, 無, 無, 無하는 사람들에게서 거리를 두게 되었다.

  • "알지 못하여 무견(無見) 떨어진 사람입니다. ... 알지 못하여 유견(有見)에 떨어진 사람입니다." - <붓다가 깨달은 연기법> 중 (이중표)

  • 이해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이러한 그림이다. 때로는 어떠한 문제 상황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 자체에 의문을 던지는 것이 유일한 해결인 경우가 있다. 이해한다는 것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문제 자체에 대한 이해인 경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