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응시, 원경의 지평
<Contemplative Contemplation - The Horizon in a distant view>

응시, 원경의 지평
<Contemplative Contemplation - The Horizon in a distant view>
"When in the height heaven was not named,
And the earth beneath did not yet bear a name,
And the primeval Apsû, who begat them,
And chaos, Tiamat, the mother of them both, --
Their waters were mingled together,
And no field was formed, no marsh was to be seen;
When of the gods of none had been called into being,
And none bore a name, and no destinies;
Then were created the gods in the midst of heaven,
Lahmu and Lahamu were called into being,
Ages increased,
Then Anshar and Kishar were created … "
- from the <Enuma Elish: The First Tablet>
'안샤르'와 '키샤르'는 고대 바빌론 창조 신화 <에누마 엘리시>에 등장하는 지평선과 수평선의 신이다. 그들은 이 <에누마 엘리시>의 첫 토판 중에 간단히 언급될 뿐이지만, 그들은 이 우주의 기원과 연관이 있는 신들이며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광범위하게 하늘신으로 추앙받는 '아누 Anu'의 부모 신들로 기록된다. '아누'는 고대 수메르나 아카드 시대 하늘신 그리고 최고신으로 섬겨지는 신이다. 나는 이 고대 바빌론 신화의 서사를 취해 지평선을 담고 있는 나의 두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가곤 한다.
나의 작업에서 '지평선'은 인지하지만 극복될 수 없는 한계를 상징한다.
모든 것들에 대한 자의적 해석이 오류를 수반할 수 있다는 점을 충분히 고려하더라도 경험적 증거는 사실과 다를 때가 많고, 그것의 이해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넘을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이 작품들은 그러한 관점 안에 있는 나의 생각과 느낌들에 대한 표현이다.
'무한'을 전제로 직사각형은 원이다
$\lim_{n \to \infty} \sum_{i=1}^{n} \text{Rect}_{i} = \text{Circle}$
The Principle of Exhaustion / 실진법적 수렴
사유의 방식에 따라 직사각형은 원이 될 수 있고, 원은 직사각형이 될 수 있다. 아르키메데스의 실진법은 불연속적인 유한(𝑛)이 연속적인 무한(∞)에 도달하려는 의지의 수학적 발현이다. 이는 디지털의 최소 단위인 직사각형 '픽셀'이 어떻게 자연의 본질인 '곡선'에 수렴하려 하는가에 대한 본질적 물음이다.
The Existential Delay / 현현의 지연
실존적 사태에서 𝑛은 결코 ∞에 도달할 수 없다(𝑛≪∞). 따라서 원(실재)은 개념 속에만 존재할 뿐 물리적으로 완벽히 현현되지 않는다. 예술은 이 도달 불가능한 극한을 향해 나아가는 '무한분할의 과정' 그 자체이며, 수렴하지 않는 알고리즘으로서의 주체의 투쟁이다.
"예술은 완벽한 전체를 향해 세계를 무한히 쪼개고 합치는 투쟁이지만,
그 끝에 결코 도달하지 못하는 '영원한 미완성'의 상태 자체를 본질로 한다."
우주 공간에는 중심이 없고, 모든 관찰자(존재하는 모든 것)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모든 관찰자(존재하는 모든 것)의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는 것은 공간에 중심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직관을 토대로 무질서하게 보이는 이 현실은 정교한 대칭상태를 토대로 한다. 무엇인가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사용된 개념이나 기호, 매체 자체에서는 나타날 수 없는 그 무엇을 요구한다.
이렇게 보면 환원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해라는 왜곡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던 것이다.
결국 우리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
또한 ‘지평’은 우리의 앞으로 “끝없이 열린 세계”를 표현한다.
이해와 통찰은 특정한 규칙들의 집합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곡률은 공간의 특징이며, 힘을 만든다 - ‘지평’은 지면의 곡률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곡률이 아니라 지평선이다. 중력 또한 공간의 곡률이며, 이것에 의해 우리는 땅에 발을 딛고 선다. 그러나 우리에게 느껴지는 것은 중력이지 공간의 곡률이 아니다. 이렇게 ‘지평’은 경험의 한계를 표현하는 은유가 된다.
표현의 방법들은 개념과 현상의 괴리의 은유로 사용된다. 기하학에서 토막내기(the method of exhaustion)는, 이를테면 원을 무한히 많은 부채꼴로 분할하면 직사각형의 넓이를 구하는 공식을 통해 원의 넓이를 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파이(pi) 값이 2024년 3월 현재 소수점 이하 105조 자리까지 계산되고도 끝나지 않았음을 생각해 볼 때, 이 일치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접근은 끊임없이 수렴하지만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즉, ‘무한’을 전제로 원은 직사각형이 된다. 그러나 무한은 개념 영역 밖에서의 현상적 실현이 확인된 바 없기에 이것은 여전히 성립할 수 없는, 그리고 확인되지 않는 문제로 남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