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PROVISATION: 기하학적 미로, RPG 게임의 은유

<RPG for Improvisation>은 탐험과 선택 구조를 음악적 즉흥연주에 접목한 상상의 프로젝트다. 연주자들은 제시된 기하학적 규칙으로 구성된 공간을 탐험하는 행위 자체를 음악으로 구성한다. 미로의 각 지점은 음높이, 화성, 음색, 리듬 등의 음악적 상태를 나타내며, 회전·반사·이동·순환·접힘·분기와 같은 기하학적 연산은 연주자가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이 된다. 연주자들은 자신에게 허용된 경로를 따라 이동하고, 서로의 선택과 만남에 반응하며 예상하지 못한 음악적 사건을 생성하게 된다. 게임을 할 때 사용하는 키보드나 마우스를 상상해보자. 내가 만드는 소리가 입력장치의 조작 행위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기하학’은 음악을 장식하는 비유가 아니라
음악적 사건이 발생할 수 있는 조건을 설계하는 원리라는 점이 중요하다.
탐험할 전체 공간은 정해져 있다. 물론 종종 게임의 규칙을 넘어 벽에 구멍을 낼 수도 있을 것이다. 탐험의 경로와 연주자 사이의 상호작용은 열려 있다. 즉흥연주는 무작위적인 음의 나열도, 완전히 결정된 구조의 재현도 아닌, 제약과 선택 사이에서 공동으로 생성되는 과정이 된다. 그리고 벽에 구멍을 뚫거나 천재지변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지금까지의 규칙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놀이의 자유도가 생각보다 높지 않다는 은유는 그래픽 환경을
CGA 즉, 80년대 컴퓨터 게임 환경의 이미지를 ‘묘사’하는 것을 통해 표현했다.
예술은 결정론에 맞서는 하나의 실천이다. 창작 과정은 무조건적 자유의 영역은 아니다. 매체의 특성, 이미 형성된 관습, 경제적 조건은 무엇을 만들 수 있는지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조건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작품의 형식과 의미가 사전에 완전히 결정되지는 않는다.주어진 조건을 이해하고 다루는 과정에서 새로운 조건을 발생시키는 것은 다른 감각, 인식을 가져온다. 이미 인정받은 형식의 반복이 안정적인 결과를 보장하더라도, 그 반복이 앞으로의 창작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면 새로운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 이때 창작은 조건의 단순한 산물이 아니라 조건을 재조직하는 실천이 된다. 시작과 끝이라는 점에 수렴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결정된 것은 아니다.
인간은 분명 생물학적 조건과 사회적 환경, 과거의 경험에 영향을 받는다. 문제는 영향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영향이 가능성을 소진한다는 결론이다. 설명은 세계의 일부를 이해하도록 돕는다. 그러나 설명을 환원적으로 수용하면 이해의 도구는 규정장치로 바뀐다. 자신의 조건을 이해하는 존재에서 조건의 결과를 반복하는 대상으로 격하된다. 예술은 자주 쓸모를 거부하고 확정되지 않은 가능성과 관계를 맺는다. 낯선 감각이나 인식을 건드리는 것은 불편할 수 있다. 생소함을 불편하게 혹은 어렵고 난해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은 굉장히 많다. 과거의 것들을 재구성하는 것이 가르치는 것이라면 불편한 것을 일깨우는 것은 나아가는 일이다.
이 놀이의 목적은 정해진 출구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미지의 공간을 탐험하며, 아직 알지 못했던 음악적 관계를 발견하는 것이다.
영원히 갇혀 있을 수 밖에 없다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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