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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체탐구 전시에 관하여

  • 작성자 사진: Bhang, Youngmoon
    Bhang, Youngmoon
  • 1월 31일
  • 4분 분량

최종 수정일: 2월 15일

βλέπομεν γὰρ ἄρτι δι’ ἐσόπτρου ἐν αἰνίγματι.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듯 희미하나.


1세기 초엽을 거닐던 사도 바울의 문장은 우리가 처한 인지의 풍경을 그려낸다. 우리는 대지를 직접 마주하고 있다고 믿으며 걷지만, 실상 우리가 만지는 세계는 언제나 거울에 비치는 그림자다. 우리의 앎은 늘 파편적이며, 세계는 단 한순간도 온전한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인간의 감각과 직관은 세계를 통찰하기에 너무나 제한적이다.


19세기, 수학자 베른하르트 리만(Bernhard Riemann)은 기하학의 우주에서 이 문제를 찾아낸다. 공간은 하나의 얼굴을 고집하지 않으며, 관찰자의 좌표계에 따라 수많은 표정으로 변모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렇게 리만은 우리에게 ‘다양체(Manifold)’라는 개념을 가져다 주었다. 


<다양체 탐구 - 첫 번째 이야기>는 흩어진 감각들을 하나로 묶어 명쾌한 해답을 내놓는 대신, 우리가 여전히 거울을 통해 세계를 꿈꾸고 있다는 사실을 표현한다. 거울은 하나가 아니라 셀 수 없이 이어진다는 사실을 깨닫을 때, 세계가 열리기 시작한다. 직립한 인간의 교만한 높이를 버리고, 지표면의 곡률에 몸을 누이는 극한의 경험으로 초대하는 이 전시의 장을 통과하게 될 것이다. 





이 전시는 베른하르트 리만(Bernhard Riemann)의 다양체 이론이 지닌 기하학적 엄밀함과 현대 물리학의 열역학 및 상대성 이론을 예술적 실천의 장으로 가져오려는 시도를 토대로 한다. 색채-음향 매핑, 그리고 엔트로피 증가에 따른 정보의 비가역성은 주체와 세계 사이의 간극이 발생하는 다양한 기제들을 찾아내고, 이를 수용하기 위한 '극한의 과정'을 이야기한다.


각자의 ‘이해’라는 편협한 결론을 대신하여

실재와 얼굴을 맞대는 ‘마주함’의 순간들을 찾아가기 바라며.



지각, 인식과 세계는 동일할 수 없다



$\mathcal{S}_1: \lim_{h \to 0} ( \text{지각} \neq \text{세계} ) = 0$

$\forall \epsilon > 0, \exists \delta > 0 \;\text{s.t.}\; 0 < h < \delta \implies \Delta(\text{지각}, \text{세계}) < \epsilon$

$\mathcal{S}_2: \lim_{h \to 0} ( \text{- - -} ) = 0$


'지각'과 '세계'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불일치의 오차($\epsilon$)가 존재한다. 하지만 이 오차를 아무리 미세하게 설정하더라도(임의의 양수 $\epsilon$), 관찰자가 자신의 물리적 고도($h$)를 충분히 낮추어 지표면이라는 실재에 특정 거리($\delta$) 이내로 밀착한다면, 그 둘 사이의 간극($\Delta$)은 우리가 가정한 어떤 오차보다도 작아지게 할 수 있다. 진리는 고정된 명제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 어느 높이에서 대상을 마주했는가에 달렸다. 이것은 이 전시 전체에 담고자하는 메시지이며, <다양체 탐구>라는 제목에 담긴 의미이기도 하다.


나는 세계와의 “합일”을 선언하지 않고 불일치라는 진술의 효력이 소멸되는 경계를 아는 것의 중요성을 말하고자 한다. ‘등식’ 구조의 성취는 가장 오래된 불교의 경전에서 ‘불사를 얻는다’라는 표현처럼 구원이나 깨달음을 말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나의 소멸을 의미한다. 최종적으로는 그러할지라도 살아있는 동안은 적어도 ‘불일치’의 상태를 가질 수 밖에 없다. 지각과 세계의 관계는 동일성(identity)이 아니라 오차 제어(error control)의 문제다. 결국 함수도, 거리도, 대상도 없다. 남아 있는 것은 소거뿐이다. 의미를 생성하지 않고, 의미 생성의 조건을 제거한다.


진실의 수용은 이해와는 매우 다른 것이다. 결국 이해란 나에게 익숙한 것들로 수용한 것들을 제한하는 것이다. 이해란 결국 '소견'을 벗어날 수 없다. 모르는 것, 불확실한 것, 알 수 없는 것을 그대로 수용할 수 있는 것이 큰 생각이다. 나는 이것을 '합일'이나 '깨달음'과 같이 신비주의적으로 오용되는 개념이 아니라, 신체적 고도($h$)를 제어함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물리적·기하학적 수렴 상태임을 표현하고 싶었다.



전시의 주제인 다양체(Manifold)




구면의 계량 $ds^2 = R^2(d\phi^2 + \sin^2\phi\, d\theta^2)$

에서 임의의 한 점 $(\phi_0,\theta_0)$ 근방을 보면,

$\sin\phi \approx \sin\phi_0 + (\phi-\phi_0)\cos\phi_0$이고,

충분히 작은 영역에서는 $ds^2 \approx R^2(d\phi^2 + \sin^2\phi_0\, d\theta^2)$로

상수 계수를 가진 평면 계량처럼 보인다.


이 전시는 베른하르트 리만(Bernhard Riemann)의 다양체 이론이 지닌 현대 기하학의 논증 방식을 인터미디어 아트(intermedia art)의 실천적 영역에서 다뤄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 전시의 기하학적 사고를 토대로 한다.


기하학적 토대: 구면 계량과 국소적 평탄성의 역설

우리가 마주하는 인식의 오차는 개별적 실수가 아닌, 우리가 거주하는 세계의 기하학적 특성에 기인한다. 이를 위해 구면($S^2$) 상에서의 미소 거리($ds$)를 결정하는 계량 텐서(metric tensor)를 $ds^2 = R^2(d\phi^2 + \sin^2\phi \, d\theta^2)$로 정의한 접근을 가져왔다. 이 수식에서 $\sin\phi$라는 변동 계수는 공간이 본질적으로 비균질한 곡률을 보유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그러나 주체가 임의의 한 점 $(\phi_0, \theta_0)$ 근방의 극소 영역, 즉 인간의 인지적 한계 내에서의 공간만을 점유할 때, 세계는 $\sin\phi \approx \sin\phi_0 + (\phi - \phi_0)\cos\phi_0 \implies ds^2 \approx R^2(d\phi^2 + \sin^2\phi_0 \, d\theta^2)$로 서술되는 근사적 평탄성을 획득하게 된다.


상수 계수를 갖게 된 이 '평면 계량'은 유한한 인지 범위를 지닌 주체에게 세계를 직선과 평면으로 오해하게 만드는 강력한 기학학적 기제다. 여기서 발생하는 오차인 사지타(Sagitta, $s$)와 지평선까지의 거리($d$)는 주체의 고도($h$)에 비례하여 증폭된다. 즉, 우리가 신뢰하는 ‘지각’은 실재하는 ‘세계’의 전역적 곡률을 상수화하여 얻어낸 일시적인 국소적 단면(local patch)에 불과하며, 높은 시선일수록 이 오역의 크기는 비대해진다.


이것은 이 전시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이며,

이 전시 이후에 이어질 나의 다음 작품을 향하는 이정표이기도 하다.



'무한'을 전제로 직사각형은 원이다


$\lim_{n \to \infty} \sum_{i=1}^{n} \text{Rect}_{i} = \text{Circle}$


The Principle of Exhaustion / 실진법적 수렴

사유의 방식에 따라 직사각형은 원이 될 수 있고, 원은 직사각형이 될 수 있다. 아르키메데스의 실진법은 불연속적인 유한(𝑛)이 연속적인 무한(∞)에 도달하려는 의지의 수학적 발현이다. 이는 디지털의 최소 단위인 직사각형 '픽셀'이 어떻게 자연의 본질인 '곡선'에 수렴하려 하는가에 대한 본질적 물음이다.


The Existential Delay / 현현의 지연

실존적 사태에서 𝑛은 결코 ∞에 도달할 수 없다(𝑛≪∞). 따라서 원(실재)은 개념 속에만 존재할 뿐 물리적으로 완벽히 현현되지 않는다. 예술은 이 도달 불가능한 극한을 향해 나아가는 '무한분할의 과정' 그 자체이며, 수렴하지 않는 알고리즘으로서의 주체의 투쟁이다.


"예술은 완벽한 전체를 향해 세계를 무한히 쪼개고 합치는 투쟁이지만,

그 끝에 결코 도달하지 못하는 '영원한 미완성'의 상태 자체를 본질로 한다."


우주 공간에는 중심이 없고, 모든 관찰자(존재하는 모든 것)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모든 관찰자(존재하는 모든 것)의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는 것은 공간에 중심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과 같다. 수학자도, 물리학자도 아닌 나는 이것을 내 언어로 표현하기 쉽지 않다. 그렇기에 여러 매체들을 통해 이러한 나의 인식을, 느낌을 표현하고자 했다.


색채를 음악으로 번역하는 작업은 단순한 대응 관계의 설정을 넘어, 하나의 감각 체계를 전혀 다른 물리적 질서를 가진 체계로 전위시키는 '변환의 사건'이다. 이 과정은 언제나 특정한 선택과 구조적 압축을 전제로 한다. 예를 들어, 특정 색조($hue$)는 음고($pitch$)로, 채도($saturation$)는 음량($volume$)이나 밀도로, 명도($value$)는 음역이나 배음 구조로 치환되나, 이 치환은 결코 등가적(equivalent)이지 않다. 우리의 직관을 토대로 무질서하게 보이는 이 현실은 정교한 대칭상태를 토대로 한다. 무엇인가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사용된 개념이나 기호, 매체 자체에서는 나타날 수 없는 그 무엇을 요구한다.


열역학은 이러한 상황을 설명하는 강력한 모델을 제공한다. 기체의 무수한 미시적 상태(microstates)를 일일이 기술하는 대신 온도와 압력 같은 거시 변수(macrovariables)로 시스템을 설명하듯, 나는 여기서 색채-음향 매핑 역시 색의 스펙트럼, 질감, 빛의 산란과 같은 미시적 복합성을 몇 개의 음악적 파라미터로 가져오는 시도를 해보고 있는 것이다. 이는 통계적 평균화에 기반한 구조적 압축이기도 한데, 압축은 필연적으로 정보의 손실을 동반한다. 무수한 미시 정보가 평균화되면서 발생하는 이 '정보의 열(heat)', 그러니까 에너지의 손실, 효율의 저하는 어쩌면 체계가 더 이상 구분해내지 못하는 소실된 진실의 총량에 대한 은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예술가는 수많은 틈, 그 균열 가운데 발생하는 '노이즈'를 통해 세계의 해상도를 재설계하는 것은 아닐까? 자연은 정보의 노이즈를 이분법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인간의 편의적 이해가, 인식이 그렇게 할 뿐이다. 어쩌면 예술은 그러한 인간의 '습성'을 넘어보려는 시도는 아닐까?


이렇게 보면 환원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해라는 왜곡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던 것이다.

결국 우리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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