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도주, 다층적 혁명: <Kind of Blue> 다시 듣기
- Bhang, Youngmoon

- 2025년 7월 21일
- 5분 분량
재즈를 잘 모르더라도 사람도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의 <Kind of Blue>라는 앨범을 들어본 이들이 많을 것이다. 1959년, 단 두 번의 세션으로 녹음된 이 앨범은 출반된지 반세기가 넘은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재즈 앨범 중 하나로 여전히 그 명성을 드높이고 있다. 그 서정적인 아름다움, 보편성, 혁신이라는 공로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재즈 역사상 가장 근본적인 ‘이중의 단절’, 두 번의 위대한 저항, 그리고 다층적 해방의 서사가 이 앨범의 토대를 이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세상의 빛을 본지 이미 60년이 넘은 이 앨범은 완전히 새로운 관점으로, 느낌으로 다시 들리게 되리라 확신한다.
<Kind of Blue>는 지배적인 음악 제국으로부터 감행된 첫 번째 도주가, 새로운 헤게모니가 되어버린 시점에 일어난 두 번째의 ‘차가운 도주(A Cool Fugitive)’이며, 그 자체로 완결된 하나의 ‘도주하는 공동체(Fugitive Community)’가 세운 기념비다.
이 ‘위대한 탈출의 복잡한 계보’를 이해하기 위해 나는 현대 음악학자 마크 해너포드(Marc Hannaford)가 제시한 ‘도주하는 음악 이론(Fugitive Music Theory)’이라는 개념을 토대로 이 앨범을 다시 풀어보려 한다. 해너포드가 재즈의 역사를 재조명할 때, 우리는 <Kind of Blue>가 단 하나의 혁명이 아니라, 한 혁명의 성과물이 만들어낸 새로운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또 다른 혁명, 몸부림이었다는 흥미로운 이야기와 만난다.

첫 번째 도주 - 저항으로서의 비밥(Bebop)
마일스 데이비스로 표상되는 ‘두 번째 탈주’ 대상이었던 ‘고향’은 비밥(bebop)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고향 자체가 실은 첫 번째의 성공적인 도주로 세워진 ‘해방구(Maroon Community)’였다는 사실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1940년대 이전, 재즈의 주류는 스윙(Swing)이었다. 백인 밴드리더가 ‘스윙의 왕’으로 군림하던 시대, 재즈는 주로 춤을 위한 대중 오락이었고, 많은 흑인 음악가들은 이국적인 볼거리를 제공하는 엔터테이너의 역할에 머물러야 했다. 흑인 연주자들이 백인 관객을 위해 연주하던 공간은, 해너포드의 스승인 필립 이웰이 말한 ‘백인 인종 프레임(White Racial Frame)’이 작동하는 음악적 ‘플랜테이션 plantation’과 다름없었다.
어딘가 깊은 목화밭처럼 음악이 자라고 있었지만, 그 밭의 소유권은 언제나 딴 사람이 쥐고 있었다. 그들의 검은 손가락이 음악의 밭을 갈고, 음악을 수확했지만, 무대 위의 조명은 늘 다른 얼굴을 비췄다. 기보되지 않은 기억, 멋대로 채집된 재해석들, 그리고 당대 청중들의 찬사는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 비밥은 바로 이 상업주의와 백인 중심적 시선으로부터의 의식적인 ‘도주’였던 것이다. 찰리 파커, 디지 길레스피, 셀로니어스 몽크와 같은 흑인 음악가들은 할렘의 ‘민튼스 플레이하우스’ 같은 클럽의 심야 잼 세션에 모여들었다. 이곳은 백인들의 상업적 압력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실험할 수 있었던 ‘피난처(Sanctuary)’이자, 새로운 세계를 모의하던 ‘도주하는 공동체’의 본부가 된다.
그들이 단련한 음악은 그 자체로 ‘도주하는 실천(Fugitive Practice)’의 결정체였다. 비밥의 현기증 나는 템포, 극도로 복잡한 화성 진행, 기존 곡의 코드에 새로운 멜로디를 얹는 ‘콘트라팩트(contrafact)’ 기법은 단순한 음악적 실험이 아니었다. 그것은 미숙한 연주자나 상업적 타협을 하려는 자들을 “솎아내기” 위한 전략이며 기술적 진입장벽을 세우는 행위기이도 했다.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자신들의 언어’를 구사함으로써, 그들은 자신들만의 지적 공동체를 보호했다. 예측 가능한 4/4박자의 댄스 리듬을 거부하고, 불규칙하고 폭발적인 드러밍은 춤을 추려는 육체를 무대 앞에서 거부하는 행위의 음악적 표현이었을 것이다. 베레모, 염소수염, 독특한 말투(bop talk)로 대표되는 비밥 서브컬처(subculture)는 주류 사회가 강요하는 ‘웃는 엔터테이너’의 페르소나를 벗어던지고,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쿨함(Coolness)’이라는 갑옷을 두르는 행위가 아니었을까?
이처럼 비밥은 스윙 시대의 ‘플랜테이션’으로부터 성공적으로 탈주하여 흑인 음악가들의 예술적, 지적 주권을 선언한 위대한 혁명이었다. 하지만 모든 혁명이 그렇듯, 한 시대의 해방구가 다음 세대에게는 새로운 ‘감옥’이 될 수 있다는 역설을 품고 있었다.
두 번째 도주 - 기교의 감옥으로부터
마일스 데이비스는 비밥이라는 혁명의 중심부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이 ‘새로운 성소’의 이방인이었다. 비밥이 내세운 핵심 가치, 즉 압도적인 속도와 화려한 기교와 에너지의 과시는 마일스의 본성과 맞지 않았다. 그는 비밥의 언어를 구사했지만, 그 문법에 온전히 동의하기 어려웠다. 비밥의 영웅들이 얼마나 많은 음을 빠르게 연주하는가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했다면, 마일스는 정반대의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훗날의 회고는 그의 철학적 단절을 명확히 보여준다. “나는 항상 무엇을 빼놓을 수 있을지 생각하며 들었다(I always listen to what I can leave out).” “수많은 스케일과 잡다한 것들”을 연주하는 대신 “코드에서 가장 중요한 음들”(I didn’t ever like playing a bunch of scales and shit … I always tried to play the most important notes in the chord)에 집중하고자 했던 그의 열망은, 비밥이라는 시스템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로 이어진 것이 아닐까?
그에게 비밥의 헤게모니는 ‘기교의 감옥’이었다. 자신의 가장 큰 무기인 서정성, 독특한 음색, 침묵과 공간을 활용하는 능력이 발휘될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도주의 성공으로 세워진 비밥 공화국은 이제 그에게 또 다른 ‘플랜테이션’이 되어버렸다.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비밥의 언어를 더 유창하게 구사하는 것은 답이 아니었다. 그는 이 시스템 자체를 해체하고, 자신의 목소리가 중심이 되는 새로운 세계로의 두 번째 도주를 감행해야만 했다.
지도를 발견하다: 조지 러셀의 이론
지금 있는 곳을 떠나 새로운 곳, 새로운 개척지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방향을 잡기 위한 지도가 필요한 법이다. 마일스는 작곡가이자 이론가였던 조지 러셀이 1953년 출간한 『리디안 크로매틱 개념(Lydian Chromatic Concept of Tonal Organization, LCC)』을 통해 그의 도주와 탐험을 위한 지도로 삼았다. 마크 해너포드의 관점에서 LCC는 비밥과 마찬가지로, 주류 서구 음악 이론에 맞서 흑인 지성이 독자적으로 창조한 또 하나의 위대한 ‘도주하는 이론(Fugitive Theory)’이다. 그 핵심은 혁명적이다. 서양 음악이 수백 년간 의지해온 장음계(Major Scale)를 폐하고, 배음렬에 더 가깝고 음향적으로 안정된 리디안 음계(Lydian Scale)를 모든 것의 중심으로 삼는다. 러셀은 끊임없이 긴장을 만들고 해결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기능화성을 ‘수평적 되어감(Horizontal Becoming)’의 상태로, 그 자체로 안정되고 완결된 리디안 음계의 사운드를 ‘수직적 존재(Vertical Being)’의 상태로 규정한다.
이 전환은 즉흥연주자에게 광활한 공간을 제공했다. 더 이상 복잡한 코드 진행을 따라 달리며 정해진 답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대신, 하나의 모드(선법)라는 광활한 풍경 속에서 자신만의 멜로디를 그려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비밥의 감옥에서 벗어나 ‘수평적’ 자유의 대지로 향하는 탈출였다.
<Kind of Blue>는 바로 이 LCC라는 지도를 들고 감행한 두 번째 도주의 생생한 음향적 기록이다. 그렇게 앨범의 첫 트랙 “So What”은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여는 선언문이 되었다. 반음 거리의 도리안 모드에서 도리안 모드로 돌아오는 단순한 구조. 이것은 비밥과 비교하면 거의 텅 빈 공간이다. 앨범의 마지막 트랙 “Flamenco Sketches”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때까지 애용되던 형식마저 해체한다. 5개의 다른 모드가 순서대로 제시될 뿐, 솔로이스트는 하나의 모드 위에 원하는 만큼 머무르다 신호로 다음 모드로 넘어간다. 이것은 비밥의 화성적, 구조적 헤게모니로부터 완벽하게 탈주하여, 서정성과 공간, 그리고 개인의 목소리가 중심이 되는 차가운 ‘피난처(Sanctuary)’를 성공적으로 구축한 것이며, 훗날 마일스의 새로운 혁신들을 위한 방법론의 토대를 마련한다.
‘복잡한 동맹’
<Kind of Blue>는 마일스 데이비스 한 사람의 비전으로만 완성되지 않았다. 이 앨범은 각기 다른 이유로, 각자의 방식으로 '도주'하던 외부자들이 형성한 ‘복잡한 동맹(Complex Alliance)’의 결과물이다. 앨범에 참여한 뮤지션들은 그 자체가 주류의 규범으로부터 벗어나 있던 ‘도주하는 공동체’의 축소판이었다. 마일스 데이비스는 비밥의 기교주의라는 ‘첫 번째 해방구’가 만들어낸 새로운 속박에서 탈출해 새로운 영토를 찾아 나선 이 도주의 주도자였다.
존 콜트레인은 데이비스와 함께 모달 재즈의 세계를 탐험했지만, 그의 목적지는 또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이 앨범 이후 자신의 혁명인 “Sheets of Sound”와 <Giant Steps>로, 그리고 마침내 프리 재즈라는 미지의 영역으로 표류하듯, 그러나 강건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모험가였다. <Kind of Blue>에서 그가 뿜어내는 솔로는, 이 ‘차가운 성소’ 안에서도 또 다른 탈출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들끓는 에너지를 보여준다. 이들 가운데에도 이질적이고 결정적인 인물은 백인 피아니스트 빌 에반스였다. 그는 재즈 피아니스트이기 이전에 드뷔시와 라벨 같은 프랑스 인상주의 클래식에 깊이 심취해 있던, 또 다른 의미의 ‘도주자’였다. 러셀의 추상적인 이론적 개념을 <Kind of Blue>의 몽환적이고 서정적인 분위기로 ‘통역’해낸 것은 그였다. 스스로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예술 형식에 참여하는 백인이라는 ‘외부자’의 정체성을 가졌기에, 이질적인 두 세계(LCC의 이론과 유럽 인상주의의 감수성)를 연결하는 인물이 될 수 있었다. 그는 ‘잠정적 백인성(probationary whiteness)’이라는 복잡한 위치 위에서 이 도주하는 공동체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이다. 캐넌볼 애덜리는 사실 블루스와 비밥의 언어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그는 이 급진적인 실험에 기존 서사가 가지고 있는 힘을 불어넣는다. 그의 존재는 이 두 번째 도주가 과거와의 단절이 아니라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이들은 결코 하나의 목표를 가진 동질적인 집단은 아니었다. 각자의 역사와 지향점을 가진 개별자들이 ‘모달 재즈’라는 새로운 가능성 아래 일시적으로 형성한 연합체였다. 그들 사이의 긴장과 조화, 서로 다른 목소리의 공존이 이 앨범 <Kind of Blue>를 단조로운 실험이 아닌, 살아 숨쉬는 유기체로 만든 것이 아닐까?
<Kind of Blue>의 서사는 이처럼 복잡하고 다층적이다. 이 ‘이중의 도주 Double Fugitive’가 남긴 유산은 심오하다. 이후 재즈는 포스트밥, 퓨전 등 상상할 수 없었던 다양한 길로 나아갈 수 있는 지도를 얻었다. 이러한 행위들이 소외된 예술가와 사상가들이 지배적인 틀 안에서 인정을 구하는 대신, 스스로 새로운 틀을 창조함으로써 어떻게 새로운 세계를 열 수 있는지를 증명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이 앨범과 이에 대한 도주하는 음악이론적 관점에서의 해석은 오늘의 해방구가 내일의 감옥이 될 수 있다는 역사의 교훈을 음악으로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사례다.
가장 심오한 혁신은 종종 뜨겁고 격렬한 외침이 아닌, 자신만의 언어를 찾는 차갑고 신중하며, 끝없이 다시 시작되는 도주, 안주하지 않는 정신에서 태어난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마일스는 음악 이론을 쓰지 않았지만 그가 남긴 공백, 간결성, 왜곡, 소리의 이동 그 자체가 하나의 도주하는 이론(Fugitive Theory)의 극적한 사례다. 그는 단순히 스타일을 바꿔간 진화형 예술가가 아니라, 지배적 구조와 언어 체계, 그리고 음악적 플렌테이션으로부터 계속 도주한 ‘탈주자’이자, 청각적 망명자(auditory fugitive)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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