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Writer's pictureBhang, Youngmoon

온라인 도슨트 #2 - 플라톤 다면체 Platonic Solids

사진작가 방영문 사진전

<응시, 凝視 Contemplative Contemplation>

작가가 직접 들려주는 작품 이야기

- 플라톤 다면체 Platonic Solids


 


 

VIDEO TRANSCRIPTION


독일 막스플랑크 진화인류학 연구소의 마이클 토마셀로는 물리적인 수단인 행위를 의미와 분리할 수 있어야 기본적인 소통의 단계가 준비된다고 말합니다. 손짓과 표정이 손과 얼굴이 아니라 외부의 다른 정보를 지시하는 지표 index 임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이러한 분리는 인류의 의사소통 즉, 언어의 원시적인 단계에서 주부와 술부의 구조가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를 설명해줍니다. 나의 신체를 통해 내가 아닌 다른 대상을 가리키며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설명자인 나와 설명되는 상황을 분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손으로 사과를 묘사할 때 중요한 것은 손이 아니라 손이 묘사하는 정보인 것입니다. 달을 가리키면 달을 보아야지 손가락을 보아서는 안된다는 인식이 생기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분리’ 혹은 ‘격리’가 인간 언어의 기본적인 특징 중 하나입니다. 사실에서 사실 그 자체가 아닌 의미 혹은 개념을 분리해내는 것, 이것이 인간 지능이 다른 동물들과 확연히 다른 점입니다.


지금 보고 계시는 사진은 3D 프린터로 만든 정다면체 조형물들을 사진으로 촬영한 것들입니다.

수학적으로 가능한 정다면체는 5가지입니다. 이것을 플라톤 다면체라고도 부릅니다. 이 다면체들이 플라톤의 철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인데요, 플라톤은 <티마이오스(Timaeus c.260 B.C.)>에서 각각의 다면체들을 4원소 그리고 천상의 질서에 대응시키는데, 각각의 다면체별로 흙은 6면체, 공기는 8면체, 물은 20면체 그리고 불은 4면체와 대응 시켰습니다.

플라톤은 정 12면체에 대해 다소 모호한 결론을 내렸고, 이후 아리스토텔레스는 천국을 구성하는 물질인 “에테르 ether"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다 자기 주장일 뿐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언어의 발생과정과 우리 이해의 한계를 알고 나면 우주의 기본원소들이 플라톤 다면체의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수단이 필요했던 플라톤이 기하학적 정보를 토대로 자기 주장을 합리화를 했다는 점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3D 프린팅이라는 기술을 통해서 우리는 데이터가 바로 사물로 변환되는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데이터가 사물로 조형된 피사체를 다시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하면 눈에 보이는 대상물은 디지털 이미지 파일로 다시 수용됩니다. 디지털 파일이 사물로, 그 사물이 다시 디지털 이미지 파일로, 그리고 그 디지털 이미지 파일이 다시 인화지에 반영된 사물이 됩니다. 지금 여러분이 보고 계신 액자 속 사진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과정들은 사물과 정보의 상관관계를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사실과 개념으로 분리되어 있는 우리 인식 프로세스 전반에 관한 저의 호기심을 표현한 것입니다.

플라톤 뿐만 아니라 17세기의 철학자 데카르트는 물론, 삶은 나비의 꿈일지도 모른다는 장자의 이야기까지, 동서양 할 것 없이 우리 인류의 생각은 이상할 정도로 현실을 부정하고 더 본질적인 세계가 있다는, 이상적인 세계가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저는 문득 인간의 언어가 세상을 인식하는 틀로 자리잡으면서 인간으로 하여금 변화하는 세상, 사실 자체로부터는 멀어지고 변화가 없는 개념으로부터 안정감을 얻게 된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먼 옛날 친구를 부르던 손짓은 영원불변에 대한 갈망으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우리의 인식의 틀인 언어가 이러한 사실과 개념의 분리 경향을 가졌다는 점이

우리가 이 세상을 본질의 그림자로 여기도록 부추기는 것입니다.


저는 플라톤 다면체와 3D 프린팅 조형 및 작업 과정 전반을 통해서

우리 인간이 가진 경향을 이해하고 그 한계상황을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려면 있는 일단 그대로 보려고 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문제가 시작됩니다.




작가노트


우주의 크기를 결정하는 요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주를 이루는 모든 요소들의 총합,

즉,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것의 질량이다.

질량은 시공간과 얽혀 공간이 휘어지기도 하고,

시간이 빨라지거나 느려지기도 한다.

중력은 가속도와 동일한 힘으로 볼 수 있고,

질량은 중력의 요인이 되며,

이러한 나타남은 질량에 의한 시공간의 왜곡에서 비롯된다.

크기를 결정하는 것은 모든 요소들이다.

따로 되어 있는 무엇이 아니다.

  • 우리 인간이 세상을 인식하는 어떠한 인식의 틀의 중심에는 어쩔 수 없이 우리 자신의 언어가 자리를 잡을 수 밖에 없다.

  • 나는 이러한 점에 중점을 두고 '인도유럽어 Indo-European Language' 문명권의 두 문명을 주제로 두었다. 하나는 고대 그리스 문명이고 다른 하나는 인도 아리안 문명이다.

  • 역사의 복잡한 실타래를 하나하나 풀어보는 시도를 하다보면 인도 아리안 문명과 고대 그리스 문명의 굉장히 다양한 접접을 찾을 수 있게 된다.

    • 첫 번째는 역시 공통 어족에서 등장하는 사고방식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파르메니데스 이후 현상계와 본질세계를 이분화하여 보았다. 이러한 불연속적 사고 방식은 지금까지도 계속된다.

    • 인도인들의 경우 제사의식을 통해 그들의 의례와 언어를 꾸준히 발전시켜 온 조상들이 있었다. 현재의 러시아 아르카임 지역에서 신타시타 문화의 유적을 발견할 수 있는데,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인도 북부의 문화의 뿌리 <리그베다>의 제식이 더 먼 옛날에는 이곳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접경 지역에서 시작된 것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 켄툼(centum)과 사템(satem)으로 양분화 할 수 있는 대부분의 인도유럽어들을 통해 우리는 유럽 지역은 주로 켄툼어 계열의 언어가, 이란과 인도 등지에서는 사템 계열의 언어가 사용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이러한 양분(兩分)은 카스피해-흑해 초원에 살고 있던 유목민들의 언어가 다양한 이주를 거치면서 복잡하게 나타나는 가운데 남아있는 공통점이다. 인도유럽어와 관련해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아나톨리아'의 인도유럽어가 이 이분법(dichotomy)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아나톨리아의 인도유럽어가 초기에 보이지 않았던 이분화 양상은 히타이트어에서 '켄툼' 계열로 관찰되기 시작한다. 이런 이유로 어떤 학자들은 아나톨리아의 인도유럽어는 켄툼으로 분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 플라톤을 비롯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기하학적으로 우아한 질서 속에서 우주의 본질을 그렸던 것처럼, 인도 아리안들은 브라흐만과 아트만의 개념 속에서 우아한 우주 질서의 본질을 그렸다. 양측 모두 현상과 본질의 불연속적 이분화를 인식의 틀로 가졌지만 그레꼬-로만 문화는 문화와 철학으로 인도 아리안의 문화는 신비주의와 미신으로 취급하는 시선도 적지 않다.

  • 그리스의 기하학은 이집트인들이 토지계획을 세우던 기술을 가져가 발전시킨 것이고, 인도 아리안들의 브라흐만이란 자신들이 말(단어)을 지어내는 프로세스에 우주적 질서를 부여한 것이다. 이런 것들에 우주의 질서니, 본질이니 한다는 것 자체가 실상 오늘날 우리가 볼 땐 자기들 잘났다고 나대는 것 이상 아무것도 아님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 화이트헤드의 철학이 불교와의 접점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자세히 보면 상당히 자이나교적 접근을 할 때가 자주 있다. 특히 업(業)을 일종의 물질입자적으로 이해하는 방향과 화이트헤드가 과정과 실재 속에서 우주를 묘사하는 가운데에 유사한 개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문득 느낄 때가 있다.

    • 초기불교에 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 질 수 있었던 것은 팔리어 경전의 로마나이즈와 한역의 대조를 통해 그 내용을 확인한 이후에 가능해졌다. 거의 20세기에 들어와서 시작된 것이다.

    • 이러한 과정에서 당대의 표현 방식들의 시제나 격과 같은 문법적 요소들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고, 이것은 다시 말해 새로운 이해가 필요한 상황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나는 이 사실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진정한’, ‘본질’, ‘입자적’ 접근과 같은 이해는 계층화와 선형적 인과성을 띄는 전형적인 우리의 사고방식인데, 불교는 이것을 철저하게 벗어나고자 하기 때문이다.

  • 사람이 원인과 결과, 본질과 현상, 시작과 끝을 상정하여 세계를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마치 우리의 어떠한 고등한 지성을 기반으로 하는 사고처럼 보이지만 사실 발생의 경로를 자세히 따져보면 이것은 매우 생물학적인 이유일 가능성이 크다.

    • 이를테면, 나무의 열매를 먹이로 살아가는 모든 동물들은 그 열매를 취하기 위한 과정을 시뮬레이션 할 수 있다는 것이 조건이다.

    • 이를테면, 원숭이가 나무를 타고 올라가 가지에 달린 열매를 먹기 위해서는

      1. 그 나무를 탈 수 있는지

      2. 가지에 매달렸을 때 나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는지

      3. 나무 사이 혹은 가지 사이에 거리가 있다면 그 간격을 내가 극복할 수 있는지

      • 등과 같은 요소들을 평가해야 한다. 그리고 다양한 시도를 하게 된다. 이러한 시도 끝에 나무 열매를 먹는 순간을 맞으면 시뮬레이션은 끝난다.

  • 우리가 동물들의 행동을 보며 ‘의외로 매우 높은 지능’에 놀라게 되는 것은 우리가 이러한 과정의 상정과 시도를 인간 특유의 지능에서 비롯된 것으로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생존과정에서의 시뮬레이션 정밀도를 통한 평가는 인간과 다른 동물들을 구분하는 변별력으로 활용되기 어렵다.

    • 여기에서 이러한 내용을 더 깊게 들어가면 결국 우주에 시작과 끝이 있다, 우주는 유한한가 혹은 무한한가와 같은 질문은 어떤 고등한 자기성찰적 의문이라기보다 스스로의 의지로 먹이를 취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동물이 가진 지능에서 비롯된 의문일 수 있다.

    • 오히려 그 다음날 배변 활동으로 싸는 똥이 어제 먹은 과일인지 아까 먹은 과일인지를 추적하고 구분할 수 있는 것이 훨씬 고등한 지능이다.


Comments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