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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s pictureBhang, Youngmoon

응시 part 2 - #1 오만가지 생각의 본래 의미와 비일관성이라는 세계의 성질

보이는 세계의 비일관성이 바로 이 세계의 실체다


사진연작

<응시 The Contemplative Contemplation Part 2>



나는 오래된 제사(यज्ञ; yajña)의 관습에 따라 낮이 밤이 되는 시간에 파도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에 섰다. 해가 지는 시각을 미리 확인하고 해가 지기 전, 11분 6초 이상 셔터를 개방해 순간이 아닌 해가 지평선으로 넘어가는 시간 내내 바다의 물결을 사진에 담는다.


사진과 전시라는 형식을 따르면서도 경계의 무경계화를 이루고자 하는 것은 욕심일까? 그렇게 움직임을 하나의 고요한 상(image)로 표현하고 나면, 다시 프레임이 없는 액자들을 이용해서 매번 다른 위치로 배열해 하나의 작품으로 구성한다. 12개의 '상'은 4장이 하나가 되는 구성으로 3작품으로 구분되도록 만든다.



카르마(業 - कर्म; karma)


무엇인가의 상태가 A에서 B로 변한다고 보았던 시간에 죽음(मृत, mṛta = dead, expired, defunct)을 면하기 위해서는 우주의 질서를 일으키는 의식을 행해야 한다는 것이 야즈냐를 만든 사람들의 믿음이었다. 이 야즈냐를 행하는 사제의 행위를 가리키던 말이 카르마(業 - कर्म; karma)였다고 한다. 그리고 순환의 질서를 유지시켜 우리가 얻는 것을 아므리따 (अमृत; amṛta)라 불렀으며 이것을 번역한 말이 감로(甘露)다. ‘죽음을 면한다’는 의미였다.


이렇게 보면, 죽음을 면한다는 것은 개체의 영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이치를 존중한다는 것, 우주의 질서, 삼라만상이 본래 되어야 할 모습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모든 것이 하나라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감로(甘露 - अमृत; amṛta)


저녁 해가 지기 전의 66분, 때로는 33분, 때로는 17분을 프레임에 담았다. 조수 간만의 차가 가장 큰 바다인 우리나라 인천 서해안의 파도는 나의 관조적 응시 contemplative contemplation 를 통해 그 형상도 사라지고, 사나운 움직임도, 소란스러움도 사라져 수면 위에 반사된 석양의 햇빛이 남긴 흔적만 남는다. 그리고 그 차분한 빛만이 나의 사진에 담긴다. 먼 옛날 베다(वेद;Veda)를 만든 사람들의 관점을 빌려보자면, 저 멀리 서해의 바다 위로 해가 지는 동안 바다의 물결을 사진에 담는 나의 행위가 바로 카르마다. 야즈냐 안에서 하나의 행위가 하나의 결과를 만든다고 믿은 것처럼.



오만가지 생각


이 연작을 구성하는 사진 중 가장 짧은 노출로 촬영된 사진의 노출 시간은 11분 6초이다. 생주이멸(生住異滅)의 주기로 끊임없이 요동치는 ‘마음’, 그리고 그 마음 안에서 하나의 생각이 머물고 사라져 가는 시간인 ‘찰나’. 전통적인 계산법을 오늘날의 시간으로 바꿔보면 한 찰나는 1/75초가 된다. 따라서 11분 6초는 오만가지 생각의 주기가 된다.


순간성 즉, 찰나 (刹那 Kṣaṇa (क्षण, “moment”))를 말하는 것은 아비다르마(阿毘達磨, Abhidharma) 즉, 상좌부, 유부에서 '논장'을 완성해 삼장(三藏, Tripitaka)을 구성하며 도입되는 개념이다.


초기불교 경전의 삼장 중 경장(經藏 Suttapitaka)율장(律藏 Vinayapitaka)은 붓다의 가르침을 최대한 그대로 암송하여 구전한 것들이라면, 논장(論藏 Abhidhamma Piṭaka)은 이론적 해석의 도입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순수주의적 접근을 한다면 실상 경장과 율장 외의 것에서 개념을 도출해 사용하는 것 자체를 왜곡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태도가 옳은가?


게다가 마가다어에서 빨리어로, 붓다의 사후 최소 6개월 가량이 지난 이후에 기억에 의존해 구축된 경전이 과연 오늘날의 다양한 매체 기록으로 인해 사람들에게는 일반적인 인식이 된 '팩트 fact'에 대한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인가? 결국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처음 그가 남긴 진리의 자취를 따라 그의 깨달음에 다가서는 것이 유일한 방법일 뿐이다. 따라서 하나의 방편(方便)적 접근으로 논장의 개념들을 활용하며 그것이 원래의 가르침을 가리키는 방향을 보게 된다면 그 또한 덕이 되는 것이라 생각된다.



66분에서 11분 7초의 노출 시간


나는 이 연작을 통해 강렬하게 요동치는 형상, 그 물결이 만드는 사나운 움직임, 거대한 소리를 부정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있으면 같은 바다도 그 바라보는 방법(contemplation)에 따라 고요하고 차분한 색깔이 남는다는 사실을 사진에 표현했다. 관조적 응시(the contemplative comtemplation)를 통해 마음의 고요함을 추구한다는 메시지를 담고자 했다. 움직임을 인정하면 고요함이 남는다.




사나운 파도를 내려다보는 장소에 서서 그 바다가 잠잠하도록 만들고자 한다면 세상의 이치와 어긋난다. 그러나 그러한 움직임을 인정하고 파도와 내 마음의 요동을 가만히 응시하면 그 오만가지 생각의 시간이 더없이 고요한 시간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움직임에 대한 응시가 흔적만을 남긴다는 사진적 표현, 그를 통해 표현되는 무상(無常)함.

생각의 전환, 경계의 무경계화와 고정되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이는 전시의 방식 등을 통해

나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다.


일관성이 결여된 이 비일관성의 현실 세계의 원리가 세계의 실체라고.

오히려 안정된 영원불멸의 본질 세계란 인간의 언어적 상상이 만들어 낸 환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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