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을 변호하는 아름다운 문장들에도 불구하고 필름은 분명 주류에서 밀려났고, 계속해서 밀려날 것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디지털 이미지센서는 단순히 사진찍기의 과정을 쉽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만일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분명 필름으로 돌아가려는 시도를 하다 반복적으로 실패하게 될 것이다. 매체를 하나하나 잘 뜯어내며 고민해본다면 필름과 디지털은 이미 존재론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캐나다의 사진가이자 교육자인 Brace Barnbaum은 "내가 느끼기에 컬러사진과 흑백사진은 전적으로 다른 매체이다 I feel that color photographs and black-and-white photographs are essentially two different media"라고 주장한다. 존 사코우스키 John Szarkowski 가 William Eggleston 의 사진집에 적은 글만 보아도 사물적으로는 전혀 다를 것 같지 않은 컬러와 흑백사진이 얼마나 다른가를 알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당연히 필름 사진과 디지털 사진은 근본적으로 다른 매체라고 보는 것도 전혀 이상한 접근이 아니다. 더군다나 이것을 뒷받침하는 의견은 적지 않다. 그 중에서도 매우 쉽게 알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디지털 사진에서는 사진이 가진 기록적 특징이 매우 희박해진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사진'으로 인식되는 어떠한 매체를 구성하는 기본이 인화지 위에 화학적으로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이진수 코드에서 비롯된다는 것도 매우 기묘한 일이다.
카메라 자체는 세상을 복제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 그렇기에 사진의 이론 자체도 그러한 점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세상의 복제는 메시지로 그리고 그 메시지는 어떠한 대상을 가리키는 지표 index 로 바뀌었다. 퍼스의 이론에 기반한 이러한 접근이 사진의 이론적 토대를 만드는데 큰 공헌을 하였지만 이러한 접근 역시 디지털 사진 시대에는 그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이미지 센서에 맺혀 복제가능한 상태 즉, 수십메가의 디지털 파일로 저장되는 이 데이터는 이제 빛의 상을 찍어낸 것이 아니라 그것을 완전히 다른 것으로 저장했다가 변환해서 보여주게 되기 때문이다. 매체학자들은 디지털 사진은 이 지표성을 상실했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사진의 창작과정과 수용과정의 변화는 90년대 다시 회화적인 접근이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 떠오르며 부각되기도 했다.
까르띠에-브레송 Henri Cartier-Bresson 은 인위적 조명 하에서의 사진작업을 늘 부정적으로 말해왔다. 그는 "복잡한 장비와 조명장치들은 참된 작품을 방해하는 것 같다"고 말했고, 인공적인 조명은 빛을 매우 폭력적으로 다루는 것이라는 입장을 보여준다. 그러한 그의 주장은 "사진자가 외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내적이기도한 하나의 세계를 반영할 수 있는 것은, 연극용어로 말하자면 사람들이 '상황' 속에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주장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보들리야르 Jean Baudrillard 의 '시뮬라크르'를 태동시킨 플라톤의 '그림자' 같은 주장에 설명을 더하는 끊임없는 작업을 해온 서양인들의 사고를 극복하는 것 같기도 하다. 까르띠에-브레송은 "주제는 사실들을 모아 놓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했고 중요한 것은 "진정한 사실들을 그 깊이와 함께 포착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의 주장을 놓고 일종의 선을 그으며 생각을 해본다면 상황 속에서 사진적으로 남길 수 있는 소위 피크 peak 즉 절정, 상황적으로 본다면 절정 climax 에 해당하는 순간을 사진적으로 가장 의미있게 보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사진을 마음대로 '그려낼 수 있는' 오늘날에 이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필름에 대한 향수를 표현하는 것은 어찌보면 사진의 정체성이 가장 강했던 때가 필름의 시대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자신의 정체성이 명확한 것만큼 확신과 자기만족을 주는 것은 드물기 때문이다.
헌데 한편으로 보면, 까르띠에-브레송이 디지털 시대를 거부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는 "표현방식에서 우리를 매혹하는 것의 진수를 뽑아내는 방법은 무수히 많다"고 주장했다.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철학논고>를 맺으며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해야 한다"고 했던 것처럼 까르띠에-브레송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은 신선하게 두고 더 이상 논하지 말자"고 말했다. 마치 시대의 변화와는 관계 없이 자신이 개척한 세계의 가치는 잊혀지지 않을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