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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riter's pictureBhang, Youngmoon

왜 정치 기록사진을 계속 하는가?


"Jenny, I don't know if Momma was right or if it's Lieutenant Dan.

I don't know if we each have a destiny,

or if we're all just floating around accidental-like on a breeze,

but I think maybe it's both. Maybe both is happening at the same time."

- Forrest Gump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식의 메타포는 매우 부분적인 분석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우리가 경험해야 하는 세상은 몹시도 복잡한데 그에 반해 해석을 위한 각 사람의 틀은 그것을 담아내기에는 너무나 빈약하다. 예전에 어떤 책에서 "한국인은 이 우주를 한 번에 통찰할 수 있는 단순한 진리를 요구한다"는 내용을 본 적이 있다. 아마도 김용옥 교수의 책이었지 싶다. 이렇듯, 우주 전체를 꿰뚫는 진리를 원하는 사람들의 특징과 복잡해지고 있는 세상 그리고 어느 것 하나 우리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놓인 처지 등등이 사람들을 더욱 답답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 히스테릭하다 싶을 정도의 이 반응의 배경을 보면, 우주를 꿰뚫는 진리를 추구했던 위대한 지성 이를테면 아인슈타인 A. Einstein 조차 대통일장이론을 제대로 만들지 못했고, 세상은 너무나 복잡해 이제 수십명의 세계적 석학의 견해를 종합해도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 어떤 기반이 잡히기 전에 정치적 이슈를 만들어 학문과 산업을 뒤흔드는 습관도 있어 제대로 자리잡은 질서나 경제적 성과도 사실상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중간 이상의 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 사회 구성원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어느 정도의 체계와 기반이 자리를 잡는다면 우리 사회도 제대로 능력 발휘를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이를테면, 일본이 전국에 철도를 깔며 소위 '철도창가'를 내놓은 것이 1900년의 일이다. 미국의 짧은 역사를 쉽게 생각하지만 의외로 그들은 100년 이상 매년 이어지고 있는 다채로운 행사와 연례 비즈니스를 가지고 있다. 메르세데스 벤츠 Mercedes-Benz 는 1926년 등장하여 내연기관 차량의 역사와 그 시작을 같이 할 정도로 축적의 시간을 확보했다. 우리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것은 1945년 그리고 5년도 되지 않아 3년의 전쟁을 겪어야 했으니 현재 우리 사회는 1953년 이후부터 그 유래를 찾는 것이 타당한지도 모른다.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는 가운데 21세기로 넘어오기 직전 경험한 경제 위기는 사회가 확보할 축적의 시간의 상당 부분을 앗아갔다.

짧은 시간 동안 큰 변화를 겪다보니 이제는 같은 언어권이지만 서로 대화가 어려울 정도의 사고방식 차이를 보여주는 것도 사실이다. 혹자는 '남북통일보다 시급한 동서통일'이라는 주장을 할 정도였으니 지역과 세대 간 사고방식 차이가 불러일으키는 소통의 부재는 이 사회의 현실임에 틀림없다.


<어느 날의 국회의사당 본회의장>

굴리엘모 마르코니 Guglielmo Marconi 는 무선통신기술을 통해 소통이 원활해지면 세상에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 기대했다. 그의 기대와는 달리 세계는 1, 2차 세계대전으로 위기에 빠졌고, 군사작전의 핵심에는 통신의 확보가 자리했다. 그리고 웹 web 의 발달로 가속화되리라 믿었던 소통은 되려 편을 갈라 합의가 불가능한 격렬한 논쟁을 낳고 있다. 각각의 입장차는 너무나 분명하고 그 거리가 멀어 합의가 불가능할 정도로 보인다. 수천만의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대화를 할 수 있는 방법과 시간을 확보할 길이 없으니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사회가 내세우는 방식은 의회를 통해 의사를 결정하는 방법이다. 또 한편으로 '인류가 가진 다양성을 충분히 반영할 수 있는가'로 질문을 바꿔보면 이 방법이 '과연 옳은가?' 싶은 회의도 들 때가 있다. 옳은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것에 대한 비제약적 추구와 대중의 반응을 절대권력의 척도로 볼 수 밖에 없는 대부분의 사회는 되려 다양성을 파괴하고 중성화되어 유전병과 생식불능의 상태가 빠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회가 그런 기능불능의 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신호를 계속해서 보내고 있지만, 정작 보통사람들보다 조금 더 문제의 핵심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은 자기 역할에 충실하지 않고 있을 때가 자주 있기에 사람들의 분노를 사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한 세기 전의 충격적 상황으로부터 제대로 배운 것이 없는 것 같은 모습은 그들을 믿고 많은 것을 맡긴 대다수의 사회 구성원들의 분노에 불을 붙이기에 충분하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짜뉴스'라는 말은 이제 우리에게 아주 친근한 표현이 되었다. 헌데, 사실에 입각해 보도되는 기사들에도 자신들의 주장과 어긋나는 경우가 생기면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은 주저없이 그것에 가짜뉴스라는 꼬리표 tag 를 붙이기 시작했다. 뒤돌아보면, 미국의 벤자민 프랭클린 Benjamin Franklin 조차도 사람들에게 교훈적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 존재하지 않은 사건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오늘날 웹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감동적인 소위 훈내나는 수많은 사건들에 대한 동영상을 비롯한 아티클들 가운데에 이러한 유형의 콘텐츠는 상당히 많을 것이라 여겨진다.

선한 사마리아인 Good Samaritan 은 이제 고립되어 곤경에 처한 이를, 잘 모르는 사람일지언정 지나가는 길에 돕는 그런 사람을 의미하는 말이 되었지만 이 선한 사마리아인은 역사적으로 존재한 적이 없다. 강도 만난 자와 그 이웃은 존재한 적이 없지만 지난 2천년 동안 서방세계와 전세계에 울림있는 메시지를 전해왔다.

사람들은 다양한 이유로 소위 '가짜뉴스 fake news'를 생산하고 또 나른다. 논리적으로 타당하고, 부분적이지만 사실에 입각한다면 사람들은 믿고 싶은 것을 믿게 되는 것이다. 킨제이 고만 Kinsey Goman 은 "우리의 논리적 사고의 흐름은 종종 감정적 결정에 대한 타당한 합리화에 불과한 것(Our logical processes are often only rational justifications for emotional decisions)"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감성을 건드리는 것이 원하는 의사결정을 유도하는 열쇠인 셈이다. 논리적인 사람일수록 감정적인 베이스를 가지고 있다. 감정적이지 않은 사람이라면 굳이 상대방의 반대에 날을 세우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The Imprint

사회는 이제 정말 거대해졌다. 각 개인에게 있어서 '순수한 사실'은 접근할 수 없는 정보가 되었다. 리바이어던 Leviathan 의 운영은 합의에 의해 가능하다. 객관성은 현실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 결국 현실 가능한 것은 간주관성(間主觀性)이며 이것은 합의에 의해 도출된다. 캠브릿지 대학교의 장하석 석좌교수의 <온도계의 과학>은 결국 측정의 척도가 되는 요소 또한 그 안에 복잡한 사회적 합의라는 과정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 나는 왜 정치의 기록사진을 계속하고 있는가?

사진은 되려 연속된 흐름을 잘라낸다. 간혹 그것은 호소력을 가진 선전 이미지 propaganda image 가 되어 사람들에게 다가기도 한다. 5년 동안 기록한 사진을 정리해 책으로 출간하기도 했지만 이 역시 부분적인 정보에 대한 접근이며, 여전히 몇 가지 사건들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하지만 한 장의 의미있는 사진은 맥락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쉽지 않다. 적어도 각각의 사진들은 연속성을 가진 흐름을 이해하는 가운데에 만들어지는 것들이다.

이러한 작업이 갖는 목적은 특정 정치인의 홍보를 하기 위한 것에 무게가 실려 있는 것은 아니다. 특정 인물의 모습과 행동을 하나하나 주시하다보면 그 인물의 특징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런 모습들이 바로 사람들이 보기 원하는 모습들이고, 이것이 오늘 정치인을 홍보하는데 가장 적합한 사진들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기록을 원하는 사진가와 홍보를 원하는 정치인의 적절한 이해관계가 만들어진다.

안드레아 거스키 Andreas Gursky 의 말처럼 중요한 것은 "그것이 진실한가가 아니라 그것이 적절한가"에 관한 것이다. 오늘날 사회가 갖는 장치와 권력은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이다. 반대로 "그것은 어디에서 왔는가"를 묻는 것을 통해 근간을 흔들고 재정비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도 한다. 더불어 많은 이들이 사회에 속한 수많은 기능들이 실체가 모호한 허상일 수 있음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합의로 도출된 결론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 뿐인 경우도 자주 있다.

계획성과 즉흥성은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바람에 떠다니는 우연적이고 돌발적인 상황들이 삶인지 혹은 누구나 따라갈 운명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만일 이러한 것들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같이 뒤섞이며 일어나는 일들일 것이다. 어느 것이 순수하고 완벽한 정답이 될 수는 없기에 각각의 기록과 그 흔적들 통해 나름의 고민을 계속하는 것. 나는 그것이 기록자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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