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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riter's pictureBhang, Youngmoon

是禮也 - 내가 묻는다고 하는 그것이 바로 예다 - 트렌드가 아닌 나를 찾는 여행

是禮也


논어 팔일(八佾)편에는 공자가 태묘에서 질문하는 것을 비난하는 이들에게 던지는 대답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공자가 예법에 밝은 이로 관직에 임명되어 제식을 이끌어야 하는데 태묘에 들어가니 그곳 관리인에게 이것저것을 물으며 거기에 따랐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비난에 공자는 대답한다. "是禮也"



"묻는 것이 곧 예다" (김용옥 역)


아마도 이 번역과 가장 비슷한 것은 D. C. Lau 의 번역이 아닐까 싶다. 기본적으로는 공자가 자신의 지식을 하나의 고정된 "예법"으로 내세우지 않았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 This is a rule of propriety (James Legge)

  • This is the ritual (A. Charles Muller)

  • The asking of questions is in itself the correct rite (D. C. Lau)


나는 어느 날 문득, 오늘날 세계와 우리 사회의 핵심적인 의제라 할 수 있는 인권(human rights)권리(rights)라는 표현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기원전 300년경을 지나며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으로 헬레니즘이 중앙아시아 입구까지 들어온다. 플라톤의 철학이나 인도의 신비주의나 사실 말이 안되는 것은 매한가지다. 그러나 플라톤의 철학은 '추상'이라는 옷을 입고 서양철학의 근간으로 대접받는 반면, 인도철학은 미신으로 취급되기 십상이다. 이 부분은 사실 헬레니즘에서 시작된 '패권' 문제다. 카톨릭, 개신교, 이슬람 모두가 실상은 헬레니즘의 산물이다. 독단적이고 패권주의적일 수 밖에 없다.



<다면체탐구 Exploring Polyhedron> 이후의 이야기


이 작업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이나 고대 인도북동부의 철학이나 사실 그 근간이 되는 사고방식은 비슷한데, 무엇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는 '철학'으로, 인도는 '신비주의'로 취급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돌아보면 인도 철학과 관련해 너무나 많은 이들이 신비주의적 접근이나 태도로 일관한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다른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1. 플라톤의 철학이 '추상'이라는 세계로 고고해지는 동안 왜 인도철학은 자꾸만 신비주의적 옷을 입고 바보가 되려 하는가?

  2. 어쨌든 둘 다 현실적으로는 말이 안되는 이야기다. 그러나 한편은 철학으로 한편은 미신으로 취급되기에 나는 두 가지 이야기를 섞어버렸다. 헬레니즘과 인도 북부의 철학은 어차피 조상 언어가 같은, 뿌리가 같은 사고방식이다.

  3. 그러나 그 접근 방식, 사고관점 자체를 파기하는 것은 더 어리석은 짓이다. 나를 대상화시켜보면 '나'라는 존재를 바라보는 방법이 바뀐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4. 시간이 흐르고 정보가 누적되면 사람들은 합리적인 사고를 하게 될 것 같지만, 대개는 굴리엘모 마르코니의 예언이 빗나간 것처럼 더 격렬하게 싸운다. 정보의 누적은 신비주의나 종교의 쇠퇴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강화하고 오히려 문제가 더 심각한 종교들을 낳을 것이다 - 인간은 정체성과 같은 '부산물'들을 자기 존재의 본질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5. 기본적으로 짐승인 인간이 정신활동을 자신의 본질로 여기려는 것은 현실도피와 함께 잦은 망각이라는 문제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내 가설이다. 일부일처제 같은 가족주의의 등장은 실상 평등과 같은 도덕적 이유라기보다 변화한 환경 속에서 생존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영장류별로 수컷개체의 고환크기와 암컷재체의 생리주기가 매우 중요한 요소임을 연구한 사례가 있다.


이런 이유들로, 더 이상 추상적 표현을 통한 접근으로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은 어렵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지금 작업들을 나중에 다시 가져오는 상황이 되겠지만, 일단은 현실과 하드웨어들을 탐색하는 것을 통해 더 와닿는 메시지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있는 요즘이다.



子貢問曰 有一言 而可以終身行之者乎
子曰 其恕乎 己所不欲 勿施於人 (論語, 憲問)

Tsze-kung asked, saying,

"Is there one word which may serve as a rule of practice for all one's life?"

The Master said, "Is not RECIPROCITY such a word? What you do not want done to yourself, do not do to others." (James Legge)


실질적으로 '사물인터넷 IoT'이라는 개념을 고안해낸 케빈 애쉬턴 Kevin Ashton 은 '생각은 단계를 밟아 나오는 것'이라는 점을 매우 강조한다. 나는 그의 저서를 읽어 본 후에 의식적으로 소위 '트렌드'라는 것을 따르는 것을 완전히 그만두었다. 그러면서 뒤따르는 경험이 현장에 나가보면 어느 순간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 전에는 그저 다소 의문스럽게 여기던 것들이 애쉬턴의 저서를 읽은 후에 그 원인을 명확하게 알게 된 것이다. 현장에 나가면 어떠한 '용어들'이 남발되는데, 각기 다른 곳에서 대화가 진행되어도 사람들은 비슷한 것들일 이야기하거나 완전히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지속가능한 sustainable', '제 4차 산업혁명 The Fourth Industrial Revolution', '인공지능 Artificial Intelligence' 등 우리가 매일 같이 듣는 이야기들 속에는 이러한 용어들이 들어 있다. 그런데 가끔씩 내가 어떠한 견해를 듣는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용어들의 조합을 듣는 것인지 헛깔릴 때가 생기기 시작한다. 생각이 변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혹은 유행하는 용어들을 도입해서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 뿐이다. 그렇게 시작되는 의견은 대개가 그다지 들을 것이 없다.


이러한 과정들은 케빈 애쉬턴이 그의 책에서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나는 막연하게 생각하던 것들을 그의 책을 통해 확인하고 굳이 최근에 무엇이 논의되고 있는가를 고민하지 말자는 쪽으로 생각을 돌렸다. 최근에 논의되는 소위 '핫한 것들'은 내가 굳이 찾지 않아도 세상에 돌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찾아간 것은 가능한한 밑바닥 소위 토대(foundation)가 되는 것들을 찾아 간 것이다.


정합적 논의를 위해 토대를 그 밑바탕에 두고 주장을 펼치는 것에는 한계가 분명하다. 그러한 한계성은 더 근본적인 것들을 다루는 학문, 이를테면 최첨단 과학이나 철학에서는 문제가 될 수 있다. 토대주의(foundationalism) 또한 인식론(epistemology)적 관점에서 보면 접근 방식의 하나일 뿐이나, 이 자체는 어떠한 프로세스를 구축하는데 있어서 매우 유용한 방법임에는 틀림없다.



개체적 특징, 환경과 언어를 보면 이유가 보인다


나는 우리 인류가 가진 사고(思考)의 토대가 될 법한 대표적인 예로 언어를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집트 문명 그리고 인도유럽어의 발생 등등을 공부하는 과정을 가졌다. 작품은 그러한 기반으로 만들어가는데, 그러다보니 돌아오는 피드백은 "독특하다"였다. 트렌드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그것을 의식하면 개성과 정체성을 잃기 쉽다. 새로운 것이라고 따라갔더니 그 안에서 내가 사라짐을 느껴본 경험이 아직 없다면 한 번 의식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중국의 정예푸(鄭也夫)와 같은 학자의 저서를 보면 우리가 어떠한 일관된 정신활동과 의지로 만들어냈다고 생각했던 수많은 문명의 결과물이 실상은 하드웨어 즉, 우리의 육체적 여건과 별개로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 수 있도록 만든다. 프레드리히 니체(Friedrich W. Nietzsche)와 같은 철학자들도 이러한 문제를 고민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헬라어 고전에 능통한 인물이었던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는 강렬한 선언을 하고 마찬가지로 강렬한 영향력을 후대에 끼친다. 그가 만일 조금 더 살아서 20세기 초반의 새로운 발굴들과 세계대전을 보았다면 어땠을까?



'권리 rights'라는 트렌드를 벗어나 더 넓게 바라보기


현재 해답인 동시에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일까? 내가 볼 때는 바로 '인권 human rights'과 '권리 right'라는 말이다. 그런데 과연 이 접근이 옳은가에 대한 의문에 대해 나는 매우 회의적이다. 대전제로 인권이란 매우 중요한 가치이고, 개인의 권리 문제는 반드시 논의되어야 할 문제들이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해답'인가?'라는 의문을 던져보면 굉장한 희의감이 든다.


그 이유는 이렇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다음에 생각할 것 하나는

우리가 어떠한 태도를 갖는 것이 좋은가에 관한 문제이다.

오늘날의 이슈는 확실히 '권리 right'에 있다.

헬레니즘의 패권을 이야기하듯이,

이 또한 유럽과 서방세계 중심의 패권에 의한 인식이라는게 내 생각이다.

때문에 나는 되려 동아시아 전통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禮 propriety'로 방향을 잡았다.

이것은 투쟁이 아닌 숙고에서 등장한 우리의 가치관이며,

문명간 형평성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접근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또 다른 이유는 이렇다.

과거 무선통신 기술이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굴리엘모 마르코니의 예측이 빗나갔고,

웹 2.0 이후 세상은 소통과 대화가 될 것이라고 보았으나

오히려 갈라져서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싸우게 된 것처럼,

'#권리' 이해와 보장을 통한 사회의 개선은

그 어느 때보다 우리 사회를 폭력적으로 바꿔놓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예 禮'란 제삿상 밥그릇에 고개를 숙이는 행위가 아니라

타인의 의견을 묻는다고 하는 것이다.


공자가 말한 "是禮也 시례야"의 의미를 번역한 문장들을 다시 옮기는 것으로 정리해본다.


"묻는 것이 곧 예다" (김용옥)

This is a rule of propriety (James Legge)

This is the ritual (A. Charles Muller)

The asking of questions is in itself the correct rite (D. C. L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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