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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riter's pictureBhang, Youngmoon

사진연작 <다면체탐구, Exploring Polyhedron> 모든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점에서

이 사진연작 <다면체 탐구 Exploring Polyhedron>는 디지털 사진 digital photography 시대의 사진과 사물에 관한 고민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경계의 모호함을 고민하기 시작하면 우리 자신 즉, 인간을 다른 것들과 구분지을 수 있는 기준들과 경계들에 대한 의심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3D프린팅이라는 21세기 이제는 특별하지 않은 기술을 통해 시작된 소소한 작업은 인간 자신 또한 분명히 나누어지지 않는 모호한 존재임을 자각하는 상상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구상된 2018년의 <다면체탐구 Exploring Polyhedron> 사진연작은 확장되고 정리되어 왔다.


디지털 사진에 대한 거부감의 뿌리는 “중심에 있는 인본주의적 주체를 상실할 가능성에 대한 문화적 공포”(Sarah Kember)에 있다.

컴퓨터는 사실과 사물의 사이의 경계의 모호함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도구다. 사물은 스캔되어 디지털 픽셀이 된다. 디지털 픽셀은 화학적 입자를 흉내 내어 사물이 된다. 요컨대 부호가 화학적 사진의 입자 장에 이식되어 화학적 사진을 번역하고 재형상화하는 것이다. 부호가 도입되면서, 사진 이미지 (이제는 엄밀히 말해 '사진'이라기보다 ‘사진적’ 이미지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는 미세한 수준까지 조작될 수 있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디지털 사진은 화학적 사진처럼 보이지만 컴퓨터로 처리되는 정보로 구성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실상 이것은 사진과 다른 매체이며, 전통적인 의미에서는 ‘디지털 시뮬레이션 digital simulation’이라고 보아야 적절하다. - Martin Lister


  1. 개념을 사물화하는 능력이 인공물을 만드는 능력의 근간이다.

  2. 개념을 상(像 image)으로 만드는 능력이 사진 활동의 근간이다.

  3. 화학인화 사진은 ‘약호 code 가 없는 정보경제학적 돌연변이’(롤랑 바르트 Roland Barthe)로 볼 수 있지만, 디지털 사진은 그 자체가 코드에 기반한 코드 덩어리다.

  4. 따라서, 디지털 사진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사진’과 완전히 다른 매체이며, 그 본질은 디지털 시뮬레이션이라고 보아야 한다.

  5. 인간이 생산해내는 사물은 ‘형태를 취한 지적재산권’이다.

  6. 인간이 만드는 사물의 본질은 ‘말’ 즉, ‘언어’다 - 개념의 사물화

  7. 우리는 ‘말로 사물을 구축하는 능력의 극대화의 시대’ 초입에 들어섰다.


사물이란 무엇인가를 질문의 끝에는 ‘우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남을 수 밖에 없다.




다면체 탐구 Exploring Polyhedron



사물과 개념의 경계는 어디인가?

이것은 오래전부터 사진의 정체성을 논할 때면 항상 거론되었던 주제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개념이 사물이 되는 것은 우리에게 그리 낯선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과거 '신들의 세상'이 개념의 사실화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종종 잊는 것 같다. 먼 옛날 그리스인들이 벼락이 치는 원리를 알지 못했을 때 그것은 제우스 Zeus 의 전유물이었다. 강력한 신의 강력한 무기가 되는 벼락이라는 상상력은 유목민들의 문화에서 전례된 것으로 보인다.

  • 핀란드어(Finnish)에서 ilma는 "대기, 날씨"를 의미하는 일반적인 단어인데, 우드무르트어(Udmurt)를 통해 Inmar > Indra 변화의 과정을 겪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매우 많은 단어가 ra로 끝난다는 사실에서 생겨나는 ar > ra 로의 전환 이후에 비음과 r 사이에 d의 삽입이 요구된다. 이러한 구성은 인드라의 무기를 의미하는 *vaj'ra 에도 적용된다. 원시-서부 우랄어로 "망치", "도끼"를 의미하는 *vaśara는 금속 물체에 대한 외래어이다. 원시-인도-아리아어로 "전쟁신의 무기"를 의미하는 *vaj'ra - 에서 온 것으로 본다. 과거에는 전사들의 도끼나 철퇴를 의미했을 것이지만, 북유럽의 전쟁 신 토르(Thor)로부터 '해머'라는 의미를 획득한 것으로 여겨진다(Asko Papola).


그러나 19세기 후반 인간은 번개를 만들어내는 장비를 이용해 다양한 실험을 하게 된다. 한편 신에 대한 관념과 믿음을 단순한 상상력의 산물로 치부한다면 모르겠지만, #믿음 안에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 그보다 실질적인 것은 없다.


단말(端末, terminal)의 형태는 언어와 상상력에서, 전자(電子, electron)를 다루는 장치로 옮겨왔다. 우리가 듣고, 보고, 기억으로 이야기를 수용하고, 재구성했던 시대를 지나 이제 디지털(digital)이라는 기반 위에 새로운 우주를 만드는 시대에 돌입하였을 때, 우리 스스로가 개입하지 않고 만들어지는 현실을 바라보며 그것을 스스로와 비교 선상에 두고 고민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제우스의 벼락, 토르의 망치, 인드라의 바즈라(वज्र)가 우리의 언어와 상상에서 개념과 물질을 재조합하는 '장치'의 시대가 되었을 때, 우리는 주체 상실 가능성에 대한 고민을 드러내고 그것은 때로 공포로 이어진다.


자전적 기억(autobiographical memory)과 자의식은

인간이 스스로를 특별한 존재로 여기도록 만드는데 일조하는데,

과연 이것은 올바른 방향인가?



상실 가능성에 대한 공포 - 인간은 특별한가?


기술 임계점의 돌파와 거기에서 개념과 사실의 경계가 무너지고 그로 인해 "중심에 있는 인본주의적 주체를 상실할 가능성에 대한 문화적 공포"(Sarah Kember)를 경험하게 되는 것은 르네상스를 지나며 신으로부터 가져온 인간중심의 세계관에 가해지는 위협이다. 이제 인간 뿐만 아니라 기계도 사고할 수 있으며, 우리는 워쇼스키 The Wachowskis 의 작품 <매트릭스 Matrix>가 보여주는 것처럼 가상현실 속에 있다는 염려를 갖게 된다. 그렇게 인간을 넘어서는 어떤 더 강한 존재로 인하여 생태계의 정점에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던 스스로의 역량에 의심을 품고 두려움을 품게 된다.


우리는 특별하지 않다.

우리가 특별하다는 믿음이야 말로

스스로가 비참한 존재라는 사실에 대한 반증에 불과하다.


(다른 동물과 인간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는)관점은 사고능력의 지능화에 관한 잘못된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 Charles Darwin

우리는 지구상 생태계 정점에 있는 생물이고 인간을 잡아먹는 천적이 나타날까봐 계속해서 두려워 할 뿐인 영장류에 불과한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21세기가 되어서도 AI에 의한, 인간에 대한 지배, 외계인의 침공, 고질라 Godzilla 와 같은 괴수의 강림을 계속해서 상상하는지도 모르겠다.


막스 플랑크 연구소 진화인류학 연구소의 공동소장을 맡고 있는 마이클 토마셀로(Michael Tomasello)는 대형 유인원들이 유연하고 지능적이고 자기규제 방식으로 생각하며 언어와 문화, 인간 수준의 사회성 없이도 그것들을 해낸다는 점을 보여준다. 행동적 자기관찰 behavioral self-monitoring 을 행동 기반 자기조절, 인지적 자기관찰 cognitive self-monitoring 을 인지 기반 자기조절 (혹은 자기성찰 self-reflection)로 설명한다.


생각은 크게 3가지로 구성된다고 설명하는데,

  • 도식적 인지 표상 - 개별적 경험을 추상적으로 다루는 인지 능력

  • 인과적이고 지향적인 추론 - 인지적 표상으로부터 추론하는 능력

  • 행동적 자기 관찰 - 자신의 의사 결정 과정을 관찰하는 능력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개별적 경험을 추상적으로 다루고, 인과를 추론하며, 결과에 대하여 평가하는 프로세스는 이미 인간 외에도 4종이나 되는 생물이 아주 구체적으로 하고 있는 '사고 思考'다. 우리가 AI의 문제를 다루기 전에 이미 인간 특유의 능력이라 보이는 것들에 관해서 다른 생물종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는 것은 당황스럽다. 단지 대형 유인원들은 여전히 인간과 그 사고 능력의 격차가 크기지만 AI는 어느 순간 인간을 역전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더 클 뿐이다.



사물과 개념의 모호한 경계를 발견하다


사물과 개념의 경계에 대한 고민은 이처럼 많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나는 플라톤 다면체 Platonic Solids 를 #3D프린터 를 이용해 만들고 그것을 사진으로 담아내는 작업 과정을 진행하면서,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Alfred N. Whitehead 의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 fallacy of misplaced concreteness 를 중심이 되는 생각으로 상정했다. 사실의 세계 너머 본질의 세계가 있다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생각은 기호, 상징, 개념을 이용한 지적 탐구의 세계로 향하는 초석을 닦았다. 상상과 언어 속에 머물던 세계는 인간이 만든 '장치'에 의해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empirical world)로 들어선다. 디지털 단말은 개념과 논리의 '사실화'라는 경계에 있다는 점에서도 단말(端末, terminal)이다.


그렇다면 조금더 극적으로 관점을 돌려 가상과 현실의 구분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기본적으로 그것은 경험을 통해 전달되는 정보의 양에 있다.


우리가 눈앞의 달걀을 '진짜'라고 생각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지식과 경험에서 비롯된 정보에 모두 부합해야 한다. 그것이 '진짜 달걀'이다. 흔히 하게되는 상상처럼 우리의 뇌에 전기자극을 주어 '진짜 달걀'이 있다는 정보를 주입한다면 그것은 뇌에 직접 전달되는 전기자극만 존재하게 되므로 소위 '현실'에서 말하는 시공간 점유 즉, 뇌 밖의 정보의 양이 압도적으로 줄어든다. '질량'이라는 형태로 시공간을 점유해야 즉, 원자를 비롯한 물리적 세계를 프로그래밍하는 정교함과 충분한 정보가 있어야 '진짜 달걀'이라는 사태에 도달한다. 그렇다면 그 충분한 정보를 통해 '진짜 달걀'과 동일한 달걀을 '제작'한다면 어떤가? 그것은 '진짜 달걀'이 아닐까?


원자 단위의 복제와 #3D프린팅 기술이 가능해져서 원자구조까지 같은 달걀들을 양산한다면, 오히려 지금까지 접했던 달걀들보다 더 일관된 상태의 달걀을 얻을 수 있다. 만일 그렇다면 '결여'가 현실을 결정하는 것인가? 원자 단위에서부터 동일한 달걀들이라면 오히려 현실감이 없다고 느끼게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 방법에 비추어 본다면 사진적 현실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즉, 그것이 '진짜 사진'이 되기 위해서는 화학인화에서 수반되는 물질과 정보의 열화가 있어야 한다는 상황이 이해된다. 인간이 받아들이는 현실감은 정보의 완벽한 충족은 아닌 것이다. 이는 마치, 미시세계와 거시세계의 경계가 모호한 것처럼 현실과 가상의 세계의 경계도 모호한 것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입자적 사태가 존재의 근원이 된다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의 오류


언어에 의한 사태의 묘사, 자전적 기억, 강화되는 이야기와 정교화되는 개념화. 인류가 세상을 인식하고 재해석 하는 것에 대하여 고민하기 시작한 순간, 세상은 더 확연히 가상현실이 되어버린 것이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한 것들은 사례를 다루는 것 외에는 긴 설명이 될 필요가 없음을 느꼈다. 처음 다면체 탐구의 구상은 '사물은 개념이다'에서 출발했다. 조금 더 와닿는, 이질감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인간이 만드는 사물은 언어다'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그것을 기본으로 하는 생각 자체에는 큰 변함이 없다. 그렇지만, 중점을 옮겨 현실, 현실인지, 현실극복(지배)으로 조금 더 일관된 관점으로 변했다. 초기 구상이 구불구불한 선과 같았다면, 수정된 안은 3개의 점을 일직선으로 이은 것과 같은 모습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현실과 가상현실 즉, 현실과 매트릭스는 기본이 다르지 않다


“What is real? How do you define 'real'? If you're talking about what you can feel, what you can smell, what you can taste and see, then 'real' is simply electrical signals interpreted by your brain.” ― Morpheus, <The Matrix>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것은 반대로도 그리고 다르게도 생각 가능하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A.N.Whitehead)가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는 늘상 '차이의 방법'에 의해 관찰하기 때문에 하나의 부각된 형상 혹은 개념이 있으면 다른 쪽은 생각하기 어렵다. 현실과 가상이 다르지 않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1. 사진 속 플라톤 다면체는 1.8kb 정확히는 1,884 bytes 의 STL 파일이다.

  2. 1 byte 는 8 bits 이다.

  3. 따라서 1,884 bytes 는 15072 bits 가 된다.

  4. 이것은 하드디스크의 경우 플래터 표면에 자성입자로, USB 메모리 같은 플래시 메모리의 경우 플로팅 게이트의 전하량으로 다루어진다.

  5. 이것은 장치의 OS에서 1,884 bytes 의 STL 파일이 된다. 이것은 1,884 글자로 이루어진 문자열이다.

  6. 이 문자열은 다시 STL 파일을 다룰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에서 정 6면체(cube, hexahedron)가 된다.

  7. 이것을 FDM 방식의 PLA 필라멘트를 이용하는 3D 프린터에서 3D 프린팅 가능한 G-code 로 변환하여 작업하면 정 6면체가 된다.

플래터 표면의 자성입자 혹은 플로팅 게이트의 전자 상태가 디지털 정보의 본질이다. 입자의 운동이 우주의 근본적인 활동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실상 디지털 정보나 우리의 현실이나 전자의 활동이 근본적인 요소라는 점에서 다를 것이 없다. 세상과 통섭하는 인터페이스가 탄소 기반인 우리의 신체냐 규소 기반인 장치냐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간다면, 입자성, 비결정성, 관계성. 이것이 물리학이 보여준 것들이다. 분명 사물의 근원이 되는 '무엇인가'를 우리가 '관찰할 때' 그것이 '입자'로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입자는 상호작용 안에서만 존재를 확인할 수 있으며 미시적 차원에는 결정성의 부재 즉, 확률적 접근만 가능하다는 것이 자연의 특징이다. '입자'를 '근본'과 동일시 하는 것은 그 자체로 결론을 닫아 머릿속에서 진행되는 시뮬레이션을 완료하고 싶어하는 것은 영장류적 지능의 특징일 뿐이다. 우주는 어쩌면 "만물은 OO으로 이루어져있다"는 기술 자체를 거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가분성의 한계에 있는 어떠한 '입자' 혹은 '입자적 사태'를 존재의 근원으로 보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의 오류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고민들은 다음 작품에서 풀어가야겠다는 방향으로 정리하고 있다. "이것이 저것을 이룬다"라는 선형적인 인과 인식은 우리가 인식하고 살고 있는 거시계에 대한 대략적인 이해는 될 수 있어도 뭔가 더 깊은 이해를 해보겠다고 시도하게 되면 분명 부족한 견해가 되는 것이다.


나는 선형적 인과 인식에서 비롯된 일종의 존재론적 원인에 대한 부정의 세계로 발을 들여 놓게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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