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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riter's pictureBhang, Youngmoon

온라인 도슨트 #5 - 응시 #1 A & B

“나는 안다, 내가 보았다, 그것은 참으로 그러하다”와 같은 집착이 없다 - 앙굿따라 니까야

 


 

VIDEO TRANSCRIPTION


지금 말씀드릴 두 점을 포함하여 공통된 양식을 갖는 3점은 조금 독특한 방식으로 작업되었습니다. 촬영을 하기 위한 노출시간을 먼저 정했다는 것인데요, 대부분의 사진 촬영은 상황에 맞는 적정 노출을 찾는 쪽으로 진행하는데, 이 작품들은 노출시간을 먼저 정해두고 진행한 작업들입니다. 노출 시간을 먼저 정해두고 해가 지는 동안 셔터를 개방합니다. 이렇게 각각 16분과 17분 그리고 66분과 11분 7초의 노출시간으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처음 16분과 17분은 일종의 테스트 노출이었습니다.

이 외에도 다양한 노출시간으로 만들어진 작업들이 있지만 메시지를 담아 4장의 노출, 3점의 사진으로 정리됩니다.

착시는 뇌가 감각기관을 불신하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합니다.

이 두 사진은 우리의 감각기관과 인식의 문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작품 속 작은 사각형은 두 작품 모두 같은 밝기입니다. 같은 노출을 얹어서 인화한 것인데요, 그러다보니 원래 같은 색으로 보여야 하는데 사각형의 위치에 따라 그 색이 다르게 보입니다. 인간의 뇌가 경험을 바탕으로 주변 환경을 반영하기 때문인데요, 눈으로 들어오는 정보를 뇌가 보정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결과입니다.

신약성서 요한복음 20장에는 예수의 제자 ‘도마’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자신이 직접 못자국과 손자국을 확인하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감각기관을 통한 확인은 확실성을 위한 행동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 눈 앞에 있는 두 사각형은 같은 것인데도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눈은 시신경 앞으로 혈관이 지나가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뇌는 기본적으로 시신경 앞에 있는 혈관의 그림자를 지우기 위한 안구의 운동을 고려해서 세상을 보고 있습니다. 시신경은 정보를 1/10정도로 줄여서 전달하고, 뇌는 이것을 1/3000 정도만 골라서 수용합니다. 따라서 본다는 것은 실상 일어나는 일의 1/30000 정도에 대한 인식입니다. 이것은 뇌에 걸리는 과부하를 줄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정확도와 효율은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감각기관은 환경과 우리의 상호작용 가운데 형성되면서 적절하게 조정되는 과정을 거쳐왔습니다.

우리가 감각기관으로 확인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보존하는 문제와 관련된 것이지,

우리가 세상을 정확히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실상 우리 자신을 규정하는 상태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그대로 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 아니

보이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작가노트

  • 어쩔 수 없이 오랜 시간 소변을 참은 이가 있다고 해보자. 그 시간이 길이만큼 '적절한 장소에서의 배설 행위'에 대한 갈망이 클 것이다. 우리는 왜 이러한 괴로움을 감내할까? 그것은 인간의 존엄을 정의하는 것이 결국 사회적 행위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자연계의 동물 대부분이 이것으로 인해 고통받지 않는다. 이 경우 존엄의 추구가 고통의 원인이다.

  • 다른 작품 <수면 the surface>을 통해 '본다'는 것의 상호작용적 근간을 제시했다면, 여기 이 두 작품에서는 우리가 있는 것을 보이는대로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동일한 색상의 두 사각형은 왜 계속 다른 색으로 보이는가? 그 원인을 깊이 이해할 때쯤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 또한 깊어 질 것이다.

    • 동일한 색상의 두 사각형이 다르게 보이는 것은 태고의 생명으로부터 오늘까지 우리 안에 축적되어 온 생존 매커니즘이 반영되기 때문이다. 그림자 속에 웅크린 적을 빠르게 알아채고, 햇빛을 등진 공격자의 모습을 정확히 보기 위해 우리는 주변환경과 대상을 조합하고 또한 보정한다. 이것은 고칠 수 없는 습관보다 훨씬 더 강한 불가항력에 가까운 것이다. 문명사회 속에 고도의 인프라스트럭처를 갖추고 살아가지면 기본적으로 우리 자신은 여전히 환경 안에서의 생존과 포식 행위 등에 더 적합한 상태다.

    • 스트레스를 받으면 소화가 잘 되지 않은 것과 비슷한 이치다.

  •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려있다는 측면을 이해하는 것이 하나의 깨달음이라면, 우리의 감관과 인식이 오랜 세월에 걸친 생존을 위한 기능임을 인식하는 것 또한 하나의 깨달음이다.

  • 선형적 인과 linear causality 에 근거한 추론이 결국 결정론적 세계관을 만들어 낼 수 밖에 없는 것처럼, 순수하고 완전한 존재를 추구하는 갈망은 살아서 생동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존재론적 결론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우리 자신의 불완전함은 우리 자신을 한정하는 동시에 우리의 자유를 보증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 우리 각자가 추구하는 완전성이란 무엇인가? 결국 스스로가 갈망하는 것의 투영이다. 그것의 성취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순간의 만족?

  • 기도와 식도는 서로 엇갈리며 우리의 주요 장기들로 연결된다. 이러한 구조 덕분에(?) 우리는 밥을 먹다 죽을수도 있다. 눈 또한 마찬가지여서 눈은 구조적 결함을 상쇄하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며 사물의 상을 얻어야 한다. 나이가 들며 안구의 운동능력이 떨어지면 우리가 흔히 말아는 '노안'이 오는 것이다. 구조적 완전성이 완벽함을 담보하는가?

    • 불완전하게 와서 서서히 스러져 가야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창조의 신비'가 드러난다.

  • 감관의 불완전함은 우리의 개체적 특성과 뗄 수 없다. 자기보존을 위해서는 환경과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해야하고, 그것을 통해 감관과 인식을 정교화 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있음'을 말해주며, 다름을 가지고 자타의 인식이 가능함을 또한 의미한다. 이러한 것들은 전적으로 구분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없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 이 경우 같은 것이 다르게 보인다는 것, 말하자면 착시가 우리 자신을 정의한다.

  • 이러한 불완전함은 우리가 환경의 일부임을 보여주며 또한 독자적 개체임을 보여준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어느 정도 그러하다'고 받아들여야 하는 지점이 아닐까 한다. 더불어 수많은 감각과 감정들이 일어난다. 그렇게 세상을 경험한다.

  • 불완전하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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