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 Writer's pictureBhang, Youngmoon

플라톤과 우파니샤드 Plato & Upanishads


우리의 생각은 셀 수 없이 많은 편향을 보인다.


나는 2019년에 발표한 작품 <다면체탐구 Exploring Polyhedron>을 작업한 이후에, 관련하여 몇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찬도그야 우파니샤드(Khandogya Upanishad)의 구절 일부에서 작품을 설명하는 문장을 발췌했다. 그리고 3D 프린터를 이용해 만든 사물들을 사진으로 찍어 연작을 만들었다. 2019년 7월 발표한 사진 연작 <다면체탐구 Exploring Polyhedron>.


대부분의 철학에 대한 주장과 강의는 처음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된 것들을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과학과 관련된 것들도 마찬가지인데, 고대 그리스에서 등장했던 생각들을 현대 최첨단 과학과 연결하며 논의하는 기나긴 과정이 당연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그것을 인도철학과 연결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당황하고, 의아하게 여긴다. 물론 인도철학을 이용해 자신의 세력화와 장사를 해온 수많은 근현대 자칭 영적 스승들이 시도한 신비주의적 포장 또한 한 가지 원인이 될 수 있겠으나, 근본적으로는 서울대학교 강성용 교수의 지적처럼 유럽의 그레꼬-로만 문화가 가진 패권주의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플라톤과 우파니샤드를 함께 언급한 까닭은 역사적 근거를 통해 다양한 사건들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두 가지의 생각의 뿌리가 사실은 그리 거의 같은 곳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김용옥 교수가 'transcendental realm'과 'transmigration realm'의 도덕적 압력 moral pressure 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하는 것 역시 영생과 윤회의 세계관의 근간이 사실상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이들 사고의 뿌리가 되어주는 소위 인도-유러피안 언어는 카스피해 북쪽, 우랄 산맥으로부터 다뉴브 강(도나우 강) 인근까지 걸친 거대한 평야지대를 이동하며 생활했던 유목민들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는 것이 오늘날 가장 유력한 학설이다(마리아 김부타스의 크루간 가설). 물론 마리아 김부타스의 크루간 가설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이들이 가까운 지역에서 시작해 퍼져나간 것으로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1987년 영국 고고학자 앤드루 콜린 렌프루가 처음 주장한 신석기 시대 아나톨리아에서 비롯된 원시 인도유럽인(Proto- Indo-Europeans)에 의해 확산되었다는 '아나톨리아 가설'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리스인들과 인도인들의 사고를 이루는 뿌리가 유사하다는 점은 여전히 유효한 생각이다.


오늘날의 유럽 지역을 통해 그리스로 들어갔느냐, 시리아와 이란을 거치며 남진을 계속해 인도 아대륙으로 들어갔느냐라는 지리적 차이도 분명 존재하고, 페니키아 문자의 영향을 받아 고대 그리스 문자와 브라흐미 문자가 만들어 진 것은 이러한 이동의 시기보다는 정착의 시기였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일반적으로 인도의 베다가 성립했다고 여겨지는 기원전 1,500년 경에는 그것을 기록할 문자가 없는 상태로 구전전승을 했던 상황 등 '변천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는 굉장히 많았다. 학자들에 따라 구전전승의 특징을 다르게 보기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문자가 없고 당연히 매체가 정교하지 못했던 과거의 상황을 생각해본다면 언어가 분할되는 경우는 굉장히 많았을 것이다.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만 놓고 보아도, 창시자인 고타마 싯달타의 언어는 마가다어였고, 그것을 전승한 언어는 빨리어였으며, 이후 기록/전승을 하게 된 언어는 산스크리트어였다.


나는 이러한 상황과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오늘을 사는 우리가 과거의 '그것'이 말해진 시점에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이제 없다. 따라서 '그것'이 만들어진 전반적인 상황과 변천의 과정을 이해해야만 가장 본질에 가까운 답을 얻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인도철학, 베다, 우파니샤드 등에서 언급하는 아트만(ātman)을 이야기하는 것이나 플라톤의 정다면체를 이야기하는 것이나, 그것들이 우주의 실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근현대 과학의 세뇌를 받은 우리들은 잘 알고 있다. 플라톤처럼 천상의 존재를 언급하거나, 우파니샤드에서 자주 등장하는 심장의 공간을 이야기하며 그것을 사실처럼 이야기하게 되면 그 사람은 대개 바보나 정신병자 취급을 받게 된다. 그것은 단순히 우리가 근현대 과학의 세뇌를 당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의 관점은 플라톤이나 우파니샤드 이후 약 2,500년을 거치며 그들보다 훨씬 정교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형성된 것이라는 점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미신적이고 광신적으로 사고하는 경우가 많은데, 캐임브릿지 대학의 장하석 교수가 지적하는 것처럼, 물이 1기압에서 섭씨 100°C 에서 끓는다는 것을 덮어두고 믿는다는 점만 보아도 그렇다.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플라톤이 우주를 구성하는 근본적인 요소가 정다면체로 되어 있다고 생각한 것, 인도인들이 존재하는 것들의 아트만(我, ātman)을 생각한 것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물이 1기압에서 섭씨 100°C 에서 끓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근본적으로는 ‘같은 층위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점이다. 때문에 본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이나 고대 인도인들은 자신들이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자신들의 언어 뒤편에 남겨두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들을 전승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사용’하는 동안 그러한 깊이가 사라지고 개념의 증대라는 함정에 빠지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칼 포퍼 Karl Raimund Popper 의 주장에서 우리는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들을 얻을 수 있다. 즉, 충분한 데이터를 모아서 도출하는 귀납적 결론 또한 그 결론이 옳다는 논리적 보장을 찾을 근거가 부족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귀납적 추론이란 경험적 사실들을 모아서 일반화하는 것이다. 때문에 종종 증명할 수 없는 것을 증명하려 하다보면 이러한 과정이 순환논리에 빠져 결론도출이 불가능한 상태를 만들어 버린다.

현재 우리가 ‘과학적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수많은 내용들이 사실은 정확히 증명되지 않은 사례가 적지 않음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관측의 이론 적재성 the theory-ladenness of observation 처럼 정확한 관측을 위한 실험 도구들이 특정한 이론으로부터 그 근거를 얻어 만들어진 것임을 생각해보면, 실험과 관찰의 객관성 또한 담보될 수 없다.



세상을 읽는 최고의 문법은 '영속성'이 아닌 '변화'의 문법


나는 과학자나 과학철학자가 아니다. 때문에 이러한 과정에 대한 세부적인 논의를 하려고 시도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 우리 자신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진다는 것에 관해서는 많은 시간을 투자해 고민한다. 중요한 것은 플라톤이 티마이오스 Τίμαιος 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들 그리고 그 결론 도출을 향해가는 여정, 인도인들이 현상과 존재 그리고 이것들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려고 했던 그 ‘시도’ 속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젠 더 이상 실체로 여겨지지 않는 플라톤의 이데아, 세상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로서의 정다면체, 고대 인도인들이 생각했던 브라흐만이나 아트만과 같은 것들은 그것이 ‘무엇이다’와 같은 단순정의에 관한 질문을 던질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생각하려 했는가?’라는 프로세스 process 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생각이 진보를 이루기 위해서는 '결론 내어진 개념’이 아니라 성립해나가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과학적 진보는, 세상을 읽는 최고의 문법이 영속성이 아닌 변화의 문법이라는 점을 알려준다. 존재의 문법이 아니라 되어감의 문법이다. 세상을 사건과 과정의 총체라고 생각하는 것이 세상을 가장 잘 포착하고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다. 세상은 사물들이 아닌 사건들의 총체이다”(카를로 로벨리).


계속해서 변화하는 세상에 대한 이해를 통해 결론 도출이라는 거대한 함정에 빠지지 않고 멈추지 않고 움직이는 발자취와 같은 세상에 대한 이해를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하늘과 땅에 대한 이해를 더 깊게 만들어 줄 것이다.

0 comments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