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은 우리에게 보여지는 세계와 작가의 인식이 서로 만나는,
‘식(識)의 사물화’가 아닐까 합니다.
그렇게 사물화된 ‘인식’은 다른 사람들의 감관을 통해 수용되고
또 한 번 혹은 그 이상 각자의 인식과 이해를 통해 변해갑니다.
작가는 작품을 내놓지만, 작품은 사람들과 만나며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새로운 인식을 경험합니다.
침묵만으로는 통찰할 수 없고,
언어만으로는 소통할 수 없기에
그렇게 작가는 조금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나눕니다.
** 작가노트 전문을 읽어보시기 원하시는 분들은 파란 버튼을 눌러주세요 **
전시구성 요약
VIDEO TRANSCRIPTION
오늘날의 예술은 눈앞의 작품 뿐만 아니라 그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 전반을 통해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을 받아들여 저는 전시장에 걸려있는 작품을 중심으로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 전반을 통해 많은 분들께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먼 옛날,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베다’라는 경전을 만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어떠한 경전의 형태를 갖추기 이전부터 이들은 ‘제사의식’을 통해 그들의 세계관을 확립해 나갑니다. 오늘날의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접경 지역에 위치한 아르카임이라는 지역에서 ‘리그베다’ 제식의 원형으로 추정되는 의식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머나먼 이주를 통해 최종적으로는 인도 북부에 정착한 이들의 언어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산스크리트어’가 됩니다. 산스크리트어는 그 이름이 매우 독특한데, 인류의 언어는 대부분 그 언어를 사용하는 공동체나 민족 혹은 지역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붙입니다.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산스크리트어는 민족의 이름도 지역의 이름도 아닙니다. 산스크리트어는 ‘제사를 위해 준비하는 말’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이들에게 제사 의식은 중요한 의식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제사는 우주의 보편질서를 지키는 수단이었고, 죽음을 피하고 삶을 이어가는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이 제사에서 사용된 용어들이 불교와 더불어 한반도에 전해졌고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감로’와 ‘업’은 물론, 최근에는 요가의 보편화를 통해 수많은 산스크리트어 단어들이 우리 생활에 파고들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의 제사 의식이었던 야즈냐를 상징적으로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확립했습니다.
해가 지는 시간에 서해바다 앞에 서서 저무는 해와 함께 변하는 빛을 사진에 담아내는 행동이 그것입니다. 땅에 서서 태양과 바다가 만드는 빛을 사진에 담아내는 동안 지구에서 1억 5천만 km 나 떨어진 태양과 얇은 막처럼 지구를 둘러싼 대기, 바다가 만드는 산소와 온도의 균형들이 한순간 체험 가능한 사건처럼 다가오기도 합니다.
언어는 인간의 매우 독자적인 능력인 동시에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이 아주 강하게 느껴진 날이 있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소통의 열망을 가진 존재들이라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사람 인에 사이 간을 사용해 표현하는 인간이라는 단어는 정말 우리를 잘 설명하는 단어 같습니다. 가장 최근, 다양한 분야들에서 나오는 연구 결과들을 보면 우리 인류의 지적 능력은 의사소통을 위해 발달한 것으로 그 결론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한 인간의 일생을 지배하는 '언어'는 처음에 엄마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들으며 배워갑니다. 언어는 다른 동물들과 우리를 극명하게 나눠주는 요소입니다. 언어를 익힌 인간의 인식의 틀은 곧 언어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여기서부터 다른 문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우리 자신이 바로 그 인식의 틀 안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문제들을 오늘날 흑해 - 카스피해 초원에서 발원한 것으로 여겨지는 인도-유럽어와 그 문명들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시각화하여 여러분과 나누고 싶었습니다. 이 전시는 3D 프린팅 조형물을 사진으로 촬영한 플라톤 다면체, 해질녘 수면에 반사되는 빛의 움직임을 그림처럼 담아낸 사진, 지평선이라는 상징 그리고 현상과 개념으로 가득 채워본 3점의 작품을 포함해 총 11점의 작품으로 구성하였습니다.
작품의 캡션 QR 코드를 통해서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제가 직접 여러분께 들려드릴 수 있도록 구성하였습니다. 조금 더 관심 있으신 분들은 영상 아래의 글들을 통해 작품을 구상하는 과정 속 다양한 이야기들을 직접 확인하실 수 있도록 해두었습니다.
전시장을 찾아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여러분의 귀한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시는 만큼 값진 경험이 되어 드리는 것이
제가 무엇보다 바라는 점입니다. 이곳 전시장에서 한 번쯤 언어와 사고라는 틀을 벗어나 먼 옛날 태고의 생명이 햇빛을 향해 움직여 나갔던 감각과 같은 느낌을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좋은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작가노트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생겨난다 - 조건 A가 있을 때 조건 B가 성립한다
‘idaṃ sati ayaṃ bhavati’ (when this exists, that arises)
A → B
(when condition A exists, effect B arises)
(negation) -A → -B
(where condition A does not exist, effect B does not arise)
우주의 크기를 결정하는 요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구성 요소의 전체 질량이다.
공간과 크기가 따로 있고, 구성 요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구성 요소들이 공간의 크기를 결정한다.
시간, 공간, 크기, 현상 모든 것이 개별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관계적으로 일어난다 - 우주 전체의 크기조차도 그렇다
2021년 전시 구성 단계에서의 작가 노트:
용어와 레퍼런스 이해하기
제사(यज्ञ; yajña): 리그베다에서는 야즈냐, 아베스타에서는 야스나로 발음된다. 찬가와 불을 중심으로 하는 제식이다. 이 제식을 위해 사용된 찬가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진 <리그베다>와 <아베스타>라는 경전의 원형으로, 이 찬가들은 신(神)들에게 바쳐지는 공물(貢物, homage)이었다. 특별히 <리그베다>의 경우 훗날 우파니샤드는 물론 불교, 자이나교 개념의 기본적인 틀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오늘날에는 '요가'를 통해 많은 이들에게 파편적으로 알려져 있다.
<야즈냐>와 <플라톤 다면체>를 거론하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두 문명의 언어적 기반이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 언어권을 통해 나의 작품 구상의 기반을 만든 것은 이들의 어족인 '인도유럽어 Indo-European Language'가 주부-술부의 양분화를 가장 극명하게 나타내는 인간의 언어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러한 측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유럽과 인도의 문명이 많은 부분에서 유사한 사고기반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럽 - 서아시아 - 인도아대륙의 문화는 기원전 6세기경부터 동일한 어족 기반의 문명을 형성했고, 이것이 이후 수많은 문화교류의 기반이 되어준다. 이란인들에게 그리스의 철학인 매우 이해하기 쉬운 것이었을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성 어거스틴)과 페르시아 이슬람 시인 타브리지 문장의 유사성
"If you want to experience eternal illumination, put the past and the future out of your mind and remain within the present moment.” - Shams Tabrizi (Persian poet)
어족이 같다는 사실은 저변이 되는 사고방식에 유사점이 발견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란계 이슬람 성직지나 시인들이 그리스도교 교부철학과 비슷한 말을 종종 남겼다는 사실은 별스러운 일이 아닌 것이다. 기독교 교부인 아우구스티누스(성 어거스틴)와 페르시아의 이슬람 시인 타브리지의 문장 속에서 그들이 말하는 '영원'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비슷한지를 보면 이는 거의 누가 누구를 베꼈다고 말하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일 정도다. “언어는 사유에 선행한다”(논어한글역주, 김용옥)는 말에서 우리가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언어의 구조가 사유에 미치는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는 점일 것이다. 즉, 헬레니즘이란 카스피해를 기준으로 서진을 했던 사람들을 통해 형성되고 자리잡은 문화라면, 페르시아 문화란 카스피해를 중심으로 동남진을 해서 오늘날의 이란 지역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의 문화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처음 제식이 추구했던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기는 어려우나, 제식의 형태가 갖춰지면서 분명한 것은 신들과의 소통을 통해 자연의 질서를 추구했던 듯 하다. 산스크리트어는 물론 상당수의 인도 북부 언어의 동사들이 신들을 향한 요청의 형태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베다의 끝자락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는 <우파니샤드>는 인도 철학의 본격적인 시작점이다. 재미있는 것은 우파니샤드가 가진 사고의 골격을 자세히 보면 그리스 철학과 많이 다르지 않은 측면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현상에는 그 본질이 되는 어떠한 세계가 있다는 사고방식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리스 철학이 다소 불연속적인 측면이 강조된다면 인도 철학의 경우 불연속적이기는 하나 어떠한 접점을 더 크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스 철학이 순수한 본질세계의 추구 방향을 기하학을 중심으로 하는 고등수학에서 찾았다면, 인도 철학에서는 일종의 무한회귀적 관점을 보여준다. 양측 모두 현상과 본질의 불연속적인 파악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리그베다>와 <아베스타>) "이 두 언어의 조상인 - 문서로 남지 않은 - 부모어, 즉 공통의 인도•이란어는 서기전 1500년 훨씬 이전에 존재했음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는 이미 고 인도어가 북시리아의 미탄니 문서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 <리그베다>와 <아베스타>는 모두 공통 부모어인 인도•이란어 정체성의 본질이 언어적인 동시에 의례적인 것이며, 종족적인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만일 어떤 개인이 올바른 신에게 올바른 형식의 전통적 찬가와 시가를 써서 올바른 방법으로 희생을 올리면 그가 바로 아리안이다." - 데이비드 앤서니(David Anthony), 2007
사피어-워프 가설: 이 가설의 타당성 여부는 기본적으로 실험을 통해 증명될 수 없다는 특징으로 인해 언어 학계에서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식으로 본다. 그렇다고는 해도 '에드워드 사피어'의 관점은 매우 흥미로운 점이 있다. 즉, "현실 세계가 상당히 해당 집단의 언어 습관을 기반으로 형성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은 헬레니즘이 어떻게 유럽은 물론 중앙아시아에까지 그토록 큰 영향을 미쳤는가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로스의 성공적인 정복은 실상 아케메네스 제국의 기반과의 관계 또한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알렉산드리아와 아케메네스 제국의 범위는 매우 비슷하다. 로마의 정복으로 그레꼬-로만 문명의 영향력이 매우 커졌을 뿐이다. 아케메네스 제국사에서 매우 중요한 '페르시아'는 실상 이란인들의 국가다. 신타시타 문화 출신자들의 이주나 그리스/ 로마인들의 언어적 조상들의 이주 모두 같은 어족의 이주사임에는 틀림 없다. 이들 모두 인도-유럽어 화자들의 역사이며 이러한 언어적 정착의 역사가 깊지 않았다면 헬레니즘이 과연 중앙아시아까지 영향을 줄 수 있었을까?
사피어-워프 가설 외에도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는 주장은 인도의 신비주의 문학가들이나 유럽의 수많은 교육자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