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승려인 원효(元曉: 617-686) 대사의 이야기는 해골에 고여있던 썩은 물을 잠결에 마신 것을 깨달은 아침 '모든 것은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닫는 모습을 그린 것을 통해서 지극히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터였다. 그러던 것이 지난 달, 조계사 일정을 촬영하던 중 오간 '화쟁(和諍)'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담겼다. 불교에는 위대한 가르침이 많이 있고 이제는 전세계에 그 가르침이 번역되어 들어가고 있지만 이 화쟁은 우리의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뜨거워지기도 했다.
독일의 신학자 칼 바르트 Karl Barth 는 기독교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구원'이라는 사건을 두고 '화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언어야 방편(方便)이라하고 결국에 달을 가리키기 위한 손가락이라고 한다면 지금 화해와 화쟁의 의미 차이를 따져보는 것은 의미 없는 행동인 듯 하다. 중요한 것은 바르트가 이야기한 화해는 결국 신과 인간이 다시 이어지는 '구원'의 과정을 의미한다는 것이리라.
然今更引聖說離言之喩.
喩如虛空容受一切長短等色屈申等業,
若時除遣諸色色業,
無色虛空相似顯現.
謂除丈木處,
卽丈空顯, 除尺木處, 卽尺空顯,
除屈,屈顯,除申,申顯等.
當知. 卽此顯現之空, 似長似短, 離言之事, 如是空事.
이제 다시 부처님이 설한 '언어 환각에서 벗어남'에 관한 비유를 인용해 보겠다. 비유하건대 허공은 길고 짧은 등의 모든 형색과 구부리거나 펴는 등의 모든 행위를 다 수용하는데, 만일 모든 형색과 유형의 행위들을 제거할 때에는 형태 없는 허공이 그 제거된 형태 만큼 드러난다.
이를테면 한 길 크기의 나무를 제거한 곳에는 곧 한 길 만큼의 허공이 나타나고, 한 자 크기의 나무를 제거한 곳에는 곧 한 자 만큼의 허공이 나타나며, 구부러진 것을 제거한 곳에는 구부러진 만큼의 허공이, 펴진 것을 제거한 것에는 펴진 만큼의 허공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렇게 알아야 한다. '긴 것이 제거된 만큼 나타난 긴 허공도 허공이고, 짧은 것이 제거된 만큼 나타난 짧은 허공도 허공인 것과 마찬가지로, 실체 관념을 수립하는 언어 환각에서 벗어난 <실체 없이 존재하는 세상의 본래 면모>는, 그것을 어떤 언어에 담아내더라도 하나같이 그 면모 그대로라고.'
- 원효 (박태원 역)
이 글을 읽고 있을 때 이 글을 이루고 있는 말들의 아름다움이 마음에 찼다.
서로 다른 관점들을 충돌시켜 화(和)를 이루는(化) 화쟁은 깨달음을 위한 수단이기도 하겠지만 늘상을 피사체와 씨름해야 하는 사진에서 받아들이기에 너무도 좋은 생각이 아닌가? 사실 그러한 생각이 들었기에 이것을 공부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조계사 불교역사문화기념관>
내가 불교의 사상, 한자 문화권의 사상을 사진의 웍플로우에 직접적으로 대입해보기 시작한 것은 두 가지 글이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 하나는 막스 코즐로프가 Max Kozloff 필립 퍼키스 Philip Perkis 의 <The Sadness of Men>(2008) 의 서문에서 가부키(歌舞伎)와 노(能)를 대입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히로시 스기모토(博司杉本, Hiroshi Sugimoto)의 <Theaters>에서 작가 본인이 적은 노트에서 표현한 공(空) 사상에 대한 논의 때문이었다. 히로시 스기모토는 짧은 글과 그림으로 잘 알려진 십우도(十牛圖, ten bulls)를 언급한다. 소를 마음에 그리는 과정에서부터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까지의 과정을 10개의 그림과 짧은 글귀로 표현한 것이다.
오온(五蘊, five aggregates)이 공(空, emptiness)함을 가르치는 반야심경, 그러한 가르침에 대한 다양한 사색의 기록들. 결국 사진을 한다는 것은 기록을 남긴다는 측면과 더불어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에 대한 도전이다. 휴대가 가능한 카메라의 발명과 1, 2차 세계대전은 사진의 '기록'이라는 기능을 극대화시켜 사람들에게 인식되었지만, TV 방송이 일반화되고 비디오 카메라의 휴대가 간편해지면서 사진은 그 자리를 TV 방송에 내주어야 했다. 과거 걸프전에서 상륙한 보도작가들을 기다리던 것은 방송 카메라들이었다고 하니 말이다. 이제는 그러던 것이 웹, 소셜미디어를 이용한 생중계를 통해 복잡한 장비가 없어도 생생한 현장의 상황을 전해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제 과거 시대의 증인이라 불리던 사진은 더 첨단화된 다른 매체와 방법들에 그 자리를 내주어야 하는 상황이다.
나는 그럴수록 사진가가 가진 '바라보기의 방법 (the way of seeing)'의 중요성은 극대화된다고 생각된다. 내 눈에 보이는 상황에 대한 인식의 깊이가 더해가면 갈 수록 운문(poem)과 같은 사진의 힘은 강해진다고 믿는다. 그것이 현장에서 한 장을 찍느냐 여러 장을 찍어 고르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대상은 계속 변화하고 있고 그것을 한 번의 프레임에서 잡느냐 다양한 시점에서 잡느냐의 차이이다. 절차와 도구, 방법 등에 의해 차이는 분명히 일어나지만 그것은 대상에 대한 집중력과 비교한다면 사소한 것이 되기도 한다.
결국 하나의 상황을 바라보는 집중과
그 집중을 만드는 인지, 인식의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에센스 essence. 한정된 대상으로부터 정수를 뽑아낸다.
그러한 집중의 흐름을 만들기 위해서
원효 대사의 화쟁론이 가르치는 절차를 연습해본다.
피사체와 화(和)를 이루는(化) 한 장을 위한 과정도 비슷할 것이다.
이 드넓은 우주가
자신을 심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조그만 단백질 덩어리
뇌(腦, brain)를 만들어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잉여 공간을 만들었는지를 상상해본다.
한 장의 사진: 하나의 프레임 속에 그 바깥 세상 만큼의 집중력을 담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