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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riter's pictureBhang, Youngmoon

2022 인천개항장 국제사진영상페스티벌 온라인 도슨트 - Nov. 20. 2016



실존적 한계성이 개인을 정의한다면,

사회가 직면하는 한계성이 현대성을 말해준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우리의 실존적 한계는 가장 명확하게 우리 자신을 정의해준다.

또한 그러한 개개인들이 모여 이룬 집단이 직면하는 시대적 한계성이 곧 현대성을 정의한다.

어떠한 사조 등을 표현할 때 '현대성'을 언급하는 것은 기존의 사고방식에 대한 재고(再考)를 의미한다는 측면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접근을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생각이 형성되는 시점격의 '분기점'을 찾아야 할 때가 있다. 사진연작 <현대세계 The Modern World>는 작품의 감상을 통해 개인이 경험하게 되는 불수의적 반응(involuntary reaction)을 유도하고 이것을 기반으로 '사회적 층위'의 현상들을 바라보도록 한다. '불수의적 반응'의 유도는 크게 신체적인 감각 반응과 생각과 같은 심적 반응을 유도한다.





<2016년 11월 20일 (1) & (2)>/ <NOV. 20. 2016 (1) & (2)>

좌우로 놓인 두 작품은 한국 사회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알아보는데 어렵지 않는 얼굴들이다. 특별히 어떤 표제를 붙이기 보다는 이 사건이 있었던 2016년 11월 20일을 제목으로 쓴다. 사진 속에 앉아 있는 인물들은 전직 대통령과 총리, 주요 정당의 전직 당대표들, 광역단체장들의 모습이다. 사람들에 따라 크게 전적인 무반응, 완만한 반응, 흥미로운 반응, 반가운 반응, 분노와 같은 격렬한 반응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의 경우는 자신의 생각이 의지대로 되어지지 않는 것을 경험할지도 모른다.

생물종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이 갖는 지능은 그 뿌리가 사회성, 의사소통, 협력에 있다. ‘현대성’이라는 수식어 자체가 인류의 역사를 근간에 둔 표현이기에 그 자체로 인간의 지능을 바탕에 두고 생각해야만 하는 개념이 되는 것이다. 현대 세계는 다양한 규모의 사회적 공동체의 대표성을 띈 주체들이 이루어 온 합의의 결과물이다. 오늘날의 세계를 만든 것은 우리가 만들어 온 다양한 합의라는 점이다.


현재라는 ‘순간성’은 개념적인 것이지 실상이라 보기 어렵다. 심해를 이루는 것과 수면을 이루는 것은 모두 물이다. 환경과의 다양한 변수를 두고 나타나는 관계성에 따라 그것이 수면인지 심해인지 정해지는 것이다. 현재 혹은 현대성 또한 마찬가지다. 이 순간에는 과거적인 것도 미래적인 것도 공존한다. 현대성에는 고대성에 근간을 둔 요소들이 분명히 내포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바라보는 방식에 따라 그 ‘측면’들을 드러낸다. 안타깝게도 바라보는 이는 항상 전지적 omniscience 으로 그것을 바라볼 기회가 없다. 우리는 항상 부분적으로 보고 부분적으로 알 수 있을 뿐이다.



'분열'은 어떻게 이토록 강한 위력을 발휘하는가?


'초연결'이라는 표현이 등장할 만큼 오늘날 우리는 전세계 구석구석을 살펴볼 수 있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에 거의 모든 문명권에서 여전히 '분열의 정치'가 이토록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에 의구심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분열'을 일으키는 방법은 매우 다양하다. 먹고 살만한 국가들의 인종, 젠더 갈등을 비롯하여, 생존을 위한 이권분쟁, 주변국가들과의 국민정서를 이용한 반감을 부추기는 등 우리가 여전히 이토록 수많은 갈등의 세계를 살아간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그렇다면 국가와 문화, 민족이나 인종을 초월해 어떻게 이토록 '분열'이라는 카드는 유효할 수 있는 것인가? 나는 그 원인을 두 사람의 연구를 소개하는 것을 통해 짚어보고자 한다.



막스 플랑크 진화인류학 연구소 공동소장 마이클 토마셀로


마이클 토마셀로(Michael Tomasello)는 다양한 개체 연구를 통해 인간 지능과 생각의 기원을 추적한 연구를 그의 임기를 마치며 몇 권의 책으로 출간했다. 우리 인간이 가진 지능의 특징을 세부적으로 관찰해보면, 어째서 인류가 보편적으로 '분열'이라는 선동에 그토록 쉽게 움직이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마이클 토마셀로는 그의 저서를 통해 대부분의 대형 유인원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추론과 동일한 지적 활동이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것은 미래의 보상을 위해 작은 보상을 미루거나 포기하는 것,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행동이 필요한 경우 이전에 성공했던 행동을 포기하고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는 것, 원하는 보상을 위해 불편을 감수하고, 실패를 견디는 것은 물론, 산만한 상황에서도 집중력을 발휘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대형유인원의 자기관찰


또한 이들 대형유인원들은 충동을 조절하고, 주의력을 조절하며, 감정을 조절한다. 이것은 크게 두 가지 지적 능력에 바탕을 두는 것들이다. 하나는 '행동적 자기관찰 behavioral self-monitoring'이라 불리우는 행동 기반 자기조절이며, 다른 하나는 인지적 자기관찰 cognitive self-monitoring'이라 불리우는 '자기성찰 self-reflection'이다.


여기에 더해 대형 유인원들은 추상적인 인지 표상, 원형 논리적 추론, 심적 가지관찰을 할 수 있는데, 이렇듯 개체가 갖는 생각은 크게

  1. 개별적인 경험들을 추상적으로 도식화해 다룰 수 있는 능력인 도식적 인지표상

  2. 인지적 표상을 통해 추론을 시도하는 인과적이고 지향성이 있는 추론

  3. 자기 자신의 의사 결정 과정을 관찰해 개선하는 바탕을 이루는 행동적 자기 관찰


등이 있다. 이들을 정리해보면 대형 유인원들이 자신이 처한 수많은 상황들을 인간처럼 고민하고, 시뮬레이션해서, 다채로운 시도를 통해 자기생존 가능성과 생활 수준을 높여가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들이 인간처럼 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인간의 지능이 여기에서 더 나아가 '사회성 기반'이라는 점에서 커다란 격차를 만든다는 점이다.


사회적 층위로 들어오면 대형 유인원과 인간간의 '초격차'가 발생하는 요소들이 보인다.

  1. 자신의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인지적 표상

  2. 표상의 시뮬레이션, 인과, 지향성, 논리를 추론하는 능력

  3. 자기관찰에 기반을 두고 결과를 평가해 행동을 결정하는 능력


이러한 것들이 가능해진다. 이것은 인간만이 타인의 입장에서 상황을 개념화 할 수 있으며, 타인의 의도를 자신에게 반영하는 재귀적 추론을 하고, 집단 기준에 따라 자신의 생각을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능력은 다른 영장류들에게서 발견되지 않는 인간 특유의 지능이다.


여기에 자신의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한 '표상' 능력이 언어발달의 기본이 된다는 가설이 등장한다. 즉, 자신의 관점에서 타인의 관점으로 옮겨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의사소통'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통을 위해서는 기호화된 상징 제스처가 필요하고, 제스처 조합을 통해 다양한 '유사명재' 구사가 가능해야 한다.


이러한 방식의 누적은 '관습 커뮤니케이션'을 등장시키고, 커뮤니케이션은 세대를 거치며 전해진다. 복잡한 표상 형식으로서의 언어 구문이 등장하며, 대화와 성찰적인 생각이 가능해진다. 즉, 인간이 가진 능력의 정점은 바로 '사회성'이라는 특징을 보여준다.


커뮤니케이션의 발달을 추동하는 가장 강력한 원인은 바로 집단을 움직여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더 큰 사냥물을 잡고, 더 많은 식물을 채집해 반복되는 예측 가능한 상황을 더 효과적으로 다루는 것이다. 즉, 미래에 대한 예측이 잉여를 추구하도록 만든 것이며, 잉여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타인을 설득해야 한다.


여기에 요점이 있다. 인간지능의 발달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목표가 생긴다는 것이다. 바로 '타인을 설득하는 일'이다.



타인을 설득하는 당위성들


인류는 재귀적 인지, 자전적 기억을 획득함으로써 과거 사건들을 고려해 미래 행동을 계획하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능력의 발달과 더불어 예상하지 못했던 인식이 생겨난다. 그것은 아직 매장 풍습이 없었던 인류에게 다양한 부패 단계의 시신을 목격하며 자신을 투영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재귀적 인지, 자전적 기억의 발달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생각들은 '전방추론' 혹은 '후방추론'과 같이 대형 유인원적 지능과 융합하며 무한, 영원, 삶의 의미 같은 개념을 만들고, 우주의 기원 등을 고민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니 실상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제1원인 같은 개념은 원숭이가 나무에서 열매를 따먹기 위한 시도를 할 때 사용되는 지능과 자전적 기억의 융합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모순에 빠진 해결 불가능한 추상개념에 불과하다.


죽음이 존재의 끝이라는 사실을 근본적으로 부인하려는 시도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연결하려는 사고를 발전시킨다. 인류의 초기 정착지역들인 괴베클리테메, 할란 체미와 같은 지역들에서 조상숭배의 흔적이 발견되는 가장 타당한 이유로 이러한 생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후 이러한 생각이 거대한 구조물을 구축해 나가는데, 피라미드, 지구라트 등과 같은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 등에 남아있는 건축물들이 바로 그것이다.


정착지의 확대와 더불어 땅의 궁극적인 주인에 대한 논쟁은 빠질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조상들을 토지 그 자체로 여기는 문화가 등장하였으며, 조상과 자신의 접점을 증명하는 것을 통해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찾기도 한다. '마이크 파커 피어슨'의 저서 <죽음의 고고학>은 어떠한 권위에 대한 호소를 가장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혈통으로 맺어진 조상과의 연결성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동식물의 가축화와 작물화에서 정착생활이 일반화 되는 시점과 조상숭배의 구체화는 시기적으로 거의 일치한다.


미국의 심리학자 E. 풀러 토리는 이러한 점들을 연구하여 '신의 기원'에 대한 저서를 출간하였으며, 이러한 정당화의 누적이 결국 왕권이나 정치 공동체, 국가에서 더 나아가 제국을 세우는 논리적 정당성을 부여한다고 설명한다.

즉, 종교와 정치는 시작부터 한몸인 셈이다.



자타(自他)는 명확한 경계가 없다 ***


한 개인의 신체적 동일성은 그 개체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로 이루어진다기보다는 음식과 공기가 살이 되고, 다시 무너져서, 몸 밖으로 빠져나오는 신진대사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 마찬가지로 개인의 정신 활동은 인지 시스템이 환경의 지도를 만들고, 변화에 순응하고, 정보를 얻고, 해석적인 구성물들을 전개하고 투영하는 것과 같은 심적 사건들의 흐름이다.


"그것은 우리의 인격적 정체성의 척도인 이 항상성에 의해 유지되는 패턴이다. … 우리는 단지 끊임없이 물이 흐르는 강 속의 소용돌이들일 뿐이다. 우리는 지속하는 물건들이 아니라 스스로를 영속시키는 패턴들이다." - Nobert Wiener, Human Use of Human Beings


한 사람의 자아 개념은 그가 어떤 주어진 상황이나 활동에 적용하는 시스템의 매개변수에 달려있다. 자아라는 단어는 개인의 신체적/ 정신적 활동의 연속성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하나의 유용한 규약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 단어가 적용되어야 할 영속적이고 한정된 행위자는 없다. 베이트슨(Gregory Bateson)이 이야기하듯이, 그러한 문자적 관념의 '나'는 '그릇된 실체화'다.

(Steps to an Ecology of Mind: Collected Essays in Anthropology, Psychiatry, Evolution, and Epistemology by Gregory Bateson (마음의 생태학)).


자아는 지각하고 행동하는 것과 상호의존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즉 함께 '불타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과 따로 떨어진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 따라서 사후에 자아가 죽지 않고 살아남는가를 묻는 것은 적절한 물음이 아니다. 그러므로 如來는 사후에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하는 물음에는 답할 수 없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그 답은 행위와 분리된 행위자, 즉 경험과는 별개의 '나'를 함축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조애너 메이시(Joanna Macy) 원문 - 이중표 번역 - 에서 재인용 및 발췌



맺으며


사회성의 확대와 타인을 설득하는 것이 인류라는 생물종이 가진 지능의 특성이라면, 이 세상 온갖 것들을 동원해 당위성을 주장하고 타인을 움직이려는 노력은 그 결정체를 이룬다. 오랜 옛날에는 그것이 조상과 나와의 관계 즉, 혈통이라는 접점을 통한 것이었다면, 그것의 규모가 더 커질 때에는 '지고신'과 '왕권신학'의 도입으로 이어진다. 바빌론의 마르둑, 페르시아의 아후라 마즈다 등 고대 세계를 지배했던 거대한 국가들에는 반드시 그들의 왕권을 보증하는 '신'의 이름이 등장한다.


이러한 당위성은 오늘날 다양한 요소들과 맞물려 그 모습을 변화시켰다. 설득가능한 범위의 사람들을 최대한 결속시켜 움직임을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선민의식과 다를 것 없는 타집단과의 구분을 만들어내야 하고, 그것은 대부분 사람들의 도덕적 가치기준의 근간을 이루는 요소들과 화학반응을 일으켜 의견이 다른 집단에 대한 격렬한 분노를 일으킨다. <코끼리는 생각하지마>로 유명한 조지 레이코프(George Lakoff)는 인간이 가진 도덕관념은 가족관과 매우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고 설명한다. 이렇듯, 혈통과 사고방식, 당위성을 위한 근거의 선택은 하나의 유기체처럼 작동한다.


그러나 그 틀을 보면 고대인들이 자연의 신비를 신의 섭리로 이해했고, 원리나 개념보다 그 목적성을 중시했던 시대 '신'을 통한 자기주장의 근거를 세운 것과 현대인들의 자기주장, 이념과 정책의 선택, 정치정당을 선택하는 프로세스는 실상 그 근본이 다르지 않다는 점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정치적 열성과 종교적 맹신은 같은 것을 다르게 입힌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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