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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s pictureBhang, Youngmoon

디지털 사진 digital photography 의 가치를 묻다 01


사진이 디지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처음 사진이란 현실 속의 상이 광학적 장치들을 통해 2차원 평면에 맺히는 투사 방식, 그 투사된 이미지를 보존하는 것이었다. 화학적으로 안착된 이미지는 그렇게 사실을 반영했다. 회화가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각종 시각정보들을 재해석하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면, 사진은 그러한 코드들 없이 바로 평면에 안착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디지털 이미지센서 기술과 이미지 프로세싱 기술이 발명되었다. 이는 곧 사진의 코드 code 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다른 관점을 요구받는 것을 뜻한다. 롤랑 바르트 Roland Barthe 는 사진을 가리켜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약호 code'가 없는 메시지와의 대면"이라고 설명했지만 디지털 사진의 시대는 반대의 상황을 맞는 것이다. 디지털 사진은 코드 code 덩어리이며, 신호의 다양한 변화와 처리의 과정을 거친다. 이것은 빌렘 플루서 Vilém Flusser 가 말했던 메카니즘 구축을 위한 기술적 기호들을 이용한 카메라와 광학기술들의 구현을 넘어서 이미지 자체가 코드 없이는 성립할 수 없게 된 것이다. 48MB 크기의 사진 RAW 파일은 50,331,648개의 문자로 되어 있는 데이터이며, 이는 사진 뷰어, 편집 프로그램 등에서 사진으로 인식되는 기나긴 코드 문자열이다.



한 장의 디지털 사진까지


A Brief History of Digital Image:


디지털 사진은 존재론적으로 ontologically 화학 인화 사진과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보아야 한다. 엄밀히 따져보기 시작한다면 이것은 컴퓨터 그래픽이며, 건판이나 막에 바로 투사되는 상을 구현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프로세스를 보여준다. 19세기 초기 사진가들이 회화적 표현을 위해 수많은 합성과 편집기술을 동원해 사진 초기부터 합성사진을 만들어 왔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편집의 용이성은 디지털 사진이 가진 수많은 요소 중 하나일 뿐 편집을 디지털 사진의 특징으로 보기는 어렵다.


디지털 데이터는 바로 '코드 code'라는 중간 언어를 통해 구현 가능한 엄청난 유연성에 그 특징이 있으며 또한 이러한 요소는 디지털 데이터가 갖는 보편성 그리고 안정성을 구성한다. 즉, 수학기호와 마찬가지로 디지털 데이터는 문자열이 망가지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 어디에서나 동일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동일한 디지털 데이터를 다르게 인식하도록 만드는 요소는 사람의 감각, 단말의 사양 그리고 확인자가 처한 환경이다.


40여년 전, 처음 CGA 그래픽스를 통해 이미지가 구현되었을 때 이미지를 알아보는 것은 사람이 가진 게슈탈트 gestalt 능력에 전적으로 의존함으로써 가능했다. 화면에는 극도로 낮은 해상도로 표현되는 4개 혹은 2개의 색만 표현되었다. 연필로 그린 간단한 선을 나무, 집, 사람으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곧 컴퓨터 그래픽을 이미지로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이었던 셈이다. 저해상도 그래픽 카드에서 확대된 이미지들이 그려내는 엉성한 픽셀(pixel)들은 인간의 인식 속에서 만물(everything)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30여년의 세월과 함께 엄청나게 변한다.


다른 글에서 함께 다루었지만, 사람의 눈으로 픽셀을 볼 수 없는 해상도에 장치들이 다다른 것은 이미 상당한 세월이 흘렀다: https://www.bhangyoungmoon.com/post/cga-%EA%B7%B8%EB%9E%98%ED%94%BD%EC%97%90%EC%84%9C-%EC%8B%9C%EC%9E%91%ED%95%B4%EB%B3%B4%EB%8A%94-%EA%B0%84%EB%9E%B5%ED%95%9C-%EB%94%94%EC%A7%80%ED%84%B8-%EC%9D%B4%EB%AF%B8%EC%A7%80%EC%9D%98-%EC%97%AD%EC%82%AC



디지털 사진은 작가, 저작권자의 감독하에 원판을 통해 인화하는 에디션의 개념이 훨씬 모호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사람들의 불안감을 부추긴다. 이것은 곧 어떠한 사물의 '유일성'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이다. 물리적으로 보면 질량은 에너지이고 에너지는 곧 질량이다. 이는 다소 극적이긴 하지만, 데이터가 곧 존재의 근간이고, 존재의 근간은 데이터라는 식의 표현을 시도할 수 있도록 만드는 당위성이 되어준다.



사실의 기록이란 제한석과 해석의 여지를 말한다


현대적 거울은 1835년 독일에서 개발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인데, 니엡스가 사진인화를 성공한 것이 1826년이다. 탈포트나 다게르의 기술 등 논의가 이루어지고 다게르가 실용화한 다게레오타입이 1839년에 사진술로 인정을 받았으니 사실 현대 거울과 사진술의 개발과 실용화는 거의 동시대에 일어난 셈이다. 그 전까지는 거의 모든 사람이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인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크다. '사실'의 기록이라는 것은 어느 시대, 어느 매체나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다. 광학적으로 매우 한정된 범위만을 보여주고, 투영하며 또한 기록할 수 있게 된 것도 불과 200년이 채 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사고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인류학(人類學, anthropology)'은 이제 문자적 학문 연구 뿐만 아니라 영상 기록물을 이용한 '영상인류학'의 접근을 큰 폭으로 수용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사학(史學, history)에서도 사진을 비롯한 영상기록물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현장의 시공간을 그대로 복제하는 기록이란 어찌보면 또 다른 현실의 구축이므로,

'#기록이란' 결국 객관화에 중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기록하고 해석하고 또한 수용할 것인가에 중점이 있는 것이다.


최근 화제가 되었던 한 TV 시리즈의 관점처럼 정말로 엄청나게 강력한 퍼포먼스와 사양을 자랑하는 양자 컴퓨터로 현장의 원자 하나까지 구성해 내는 것이 가능하다면 모를까 기록이란 언제나 제한적인 결과물로 남을 수 밖에 없다. 기록은 제한적이기 때문에 '기록'이 될 수 있는 것이며, (현실적으로 불가능할지 모르나)무제한적이고 비제약적인 기록과 그 기록물에 관한 열람은 또 하나의 현실을 체험하는 것이 되기에 '기록'이라는 의미가 오히려 사라지는 상황이 된다. 우리가 약 200년전, 거울과 사진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이 크게 바뀐 것처럼, 이러한 현실구축과 동일한 기록과 구현 방식이 현실화 된다면 이 또한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정말 크게 바꾸게 될 것이다.



인간에게 사실이란 사회적 활동의 산물이다


우리는 개념화된 것들에 대해서 그것을 현실과 1:1로 맞출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플루서 Vilém Flusser 가 설명하듯이, 객관이란 개념적이고 우리에게 허용되는 것은 이른바 '간주관성(間主觀性, intersubjectivity)'이다. 객관(objectivity)이란 추상관념 이상으로 현실화 되기는 어렵다. 실존적 한계를 넘어 모두에게 공정한 객관이 존재한다는 것이야 말로 망상에 가깝다. 어떠한 경우에도 '절대적'인 것을 상정하는 것은 신앙일 뿐이다.


'#사실의_기록'이란 다자에 의해 그것이 사실에 기반했고, 보편적이라는 점을 인정받는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인간(人間)에게 있어서 '사실'이란 사회적 활동의 결과물이다. 가장 저변에서의 즉, 인지가 되지 않는 영역에서의 '사실인지' 또한 상호작용에 근거한다.


독자적 사실에는 의미가 없다. 어떤 사람들은 매트릭스 The Matrix 적인 환상과 정신활동이 세상을 만든다는 망상에 빠져서 관찰되지 않는 사실과 인간이 얽히지 않는 사실에 관해 신비적인 접근을 하길 좋아하는 경우가 생기는 경우도 있지만, 관측되지 않는 독자적 사실에 의미가 없다는 것은 인간에게 '사실'이란 사회적 의미를 부여받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관계성이란 인간성을 구성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며, 관계성에 의해 인간성이 성립한다. 인간에게 의미가 있는 '사실'이란 결국 크던 작던 사회적 의미가 있는 사실이다.


즉, 화학인화이건 디지털 사진이건 중요한 것은 사회적 합의에 의해 그것이 사실에 대한 기록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과정과 결론이다. 역방향으로 발상을 해보자. 오늘 우리는 폴라로이드를 비롯, 화학반응에 의한 사진의 현상과 인화를 알고 있기 때문에 종이 위에 생겨나는 '상 image'과 관련하여 그것의 미적 가치 혹은 기억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바라보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을 일종의 '마술'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사실 기록이 아닌 기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수용자는 물론 그것을 공유하는 구성원들과의 사회적 합의가 결과적으로 사실을 결정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게 된다. 즉, 사회성이 결여된 사실, 상호작용 속에 놓여져 있지 않은 철저한 무관계적 사실은 인간에게 있어서 의미를 부여받지 못한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불안감을 심어줄 수 있다. '진정한 의미의 사실이 아니지 않은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은 어떻게 '사실'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인가? 그 옛날 데카르트(Rene Descartes)가 던졌던 의문처럼, 과연 나는 존재하긴 하는가? 그러나 물질은 곧 에너지로 환원되어 설명될 수 있다. 그렇다면 '존재한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디지털 사진과 예술, 주체 상실의 공포를 드러내다


사라 켐버(Sarah Kember)는 디지털 사진에 대한 거부감의 뿌리를 "중심에 있는 인본주의적 주체를 상실할 가능성에 대한 문화적 공포"라고 설명한다. 이는 발터 벤야민이 보았던 초기 사진술이 보여준 기술적 복제와는 차원이 다르게 발전한 오늘날의 디지털 영상기술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벤야민이 '아우라의 상실'을 이야기 했다면, 켐버는 '주체를 상실할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이는 3D 프린팅 기술 신봉자들에 가면 아주 극적으로 비약하기도 한다. "궁극적인 꿈은 자연이 생물을 만드는 것처럼 물질을 프로그램하는 것인가?"(Chris Anderson)


플루서가 <사진 철학을 위하여 Für eine Philosophie der Fotografie>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이러한 맥락을 잘 보여준다. 인간이 도구를 만든다는 것은 사물에 정보를 주입하는 것이라고 하는 관점이 그것이다. 처음 주워 든 돌이나 막대기는 점차 의도가 반영된 구체적인 도구로 발전해 나간다. 인간은 사물에 정보를 주입한다. 이것이 복잡화 되면 정교화된 사물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즉, 인간이 만드는 인공물(artifact)은 '개념'이며 '정보'인 것이다.


대상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통해 해당하는 대상을 구축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오늘날 지구상의 수많은 현대인들에게 꽤나 보편적인 사고방식이다. 우리는 이렇게 각종 물건을 만들고, 의도한 대로 식물과 동물을 길들여 원하는 방향으로 활용한다. 그리고 그 정교함은 날로 더해가고 있어 어느 순간 크리스 앤더슨의 생각처럼 물질을 프로그램하여 생물을 만들어 내는 단계에 이를지도 모른다. 인간이 디지털 정보를 대하는 태도는 은연 중에 이러한 맥락과 맞닿아 있다. '자신의 유일무이함에 비해 복제 가능성이 높은 디지털 정보'라는 관점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3D 프린팅 기술의 발전은 이러한 관점에 점차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며, 단백질을 합성해 인공육이나 인공장기를 '#프린팅 #printing' 할 수 있다면 언젠가 '생명'이라 볼 수 있는 유기물의 프린팅도 가능할 날이 올 것이다.


나는 이러한 일련의 문제의식들을 사진 연작 속에 표현해 본 적이 있다. 2019년에 발표했던 <다면체탐구 Exploring Polyhedron>이 그것이다. 하나를 제외한 모든 피사체는 STL 파일을 G코드로 변환하여 3D 프린터로 만들어 낸 '사물'이다. 디지털 정보는 단말에 의해 사물이 되며, 사물이 된 디지털 정보는 다시 광학적 수용과정을 거쳐, 디지털 이미지 센서에 의하 시각화 된 2차원 이미지로 변환된다. 그렇게 저장된 사진은 다시 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팅 방식으로 물성을 가진 하드카피 사진으로 만들어지며, 액자에 끼워져 전시된다.





복제 가능성과 난이도가 아닌 상호작용의 문제


중심을 배제하는 것으로 그 신뢰도를 높이는 '블록체인' 기술은 이제 예술작품에도 적용되어 해당 기술이 적용된 최초의 작업들은 매우 높은 가치를 인정 받았다. 데이터의 코어 core 를 두지 않는 것을 통해 복제의 가능성을 봉쇄하는 기술은 저장된 정보 - 그것이 사물화된 '저장 방식'이던 변화되어 소위 저장매체에 코드로 저장되는 방식이던 - 를 보호하는 방법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원천적으로 복제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한 보안솔루션 시연 과정에서 해킹에 대한 철저한 대비를 설명하는 가운데 누군가 열람 중인 데이터를 사진으로 찍어 유출시켜 문제를 지적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사진 또한 원판(네거티브 등)을 통해 사진가의 감독하에 진행하는 복제의 결과를 에디션 edition 으로 정리하여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그러나 그 과정들에 대한 사회적 합의 즉, 디지털 스캔된 무한 복제보다 원판에서 인화하는 에디션이 가치가 있다는 것은 결과물의 질적 차이가 아닌 인간들의 사회적 합의에 의한 결정이다. 기술의 발전에 의해 이러한 상황과 가치에 대한 인식은 언제든지 뒤집어 질 수 있다.


과거 유향이나 소금은 매우 비싼 가격에 팔렸지만, 지금은 시내에서 간단한 식사 한 끼 할 돈이면 먼 옛날 사람들은 평생가도 구경할 수 없는 양을 구입할 수 있다. 산업혁명 이전에는 옷감 자체가 좋은 것이 의복의 질을 결정하는 커다란 요소였다. 그러나 현재는 '디자인'이라는 지적 재산을 훨씬 높게 평가하고 있다. 옷감과 그에서 비롯된 의류 제작 자체는 이제 너무나 쉬운 일이 되어 그 품질 여부 자체로는 가치의 큰 차이를 낼 수 없게 된 것이다.




디지털 정보가 그 유형에 따라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는 자력(magnetic force) 혹은 전자(electron)의 상태에 의해 on/ off 로 표현되는 이진적 binary 기록물이다. 사물로 본다면 그냥 사물 덩어리로 하드디스크를 뜯어서 노려본다 한들 우리 눈에는 얇고 매끄러운 금속 원판과 거기에 비친 한심한 행동을 하는 자신의 모습만 보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말의 다양한 장치들과 상호작용하여 이미지를 만들고 소리를 낸다. 이렇게 구축되는 정보는 다양한 유형으로, 다양한 출력장치에 의해 우리에게 보여지고 들려진다. 우리는 기나긴 on/ off 신호들을 전지구상으로 주고받으며 이것들을 보며 때로는 성적 욕망을, 유머를, 식욕을 자극하기도 하며 때에 따라서는 공포를 경험하고, 혐오를 경험하며 감동 혹은 따뜻함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이 모든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은 그것을 수용하고 재조합하는 각 개인 즉,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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